파평윤씨 문천군수공파
문지리 종친회 계보 및 역사 기록

태사공 윤신달(尹辛達)로부터 이어지는 파평윤씨의 유구한 가문 역사와 세계(世系)를 담은 문지리 종친의 계보 및 역사 기록입니다.


전체 계보도 보기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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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世 : 윤신달(尹辛達) 태사공(太師公)

01世 - 윤신달(尹辛達)

태사공(太師公).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시조로, 고려 초기 태사(太師)의 직위를 받은 인물. 파평윤씨 전체 가문의 뿌리이자 출발점.

가문의 출발

파평윤씨(坡平尹氏)는 경기도 파평(坡平)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대표적 성씨 중 하나입니다. 윤신달(尹辛達)을 시조로 하여 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수많은 명신과 공신을 배출한 명문 가문입니다.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 소재

2世 ~ 4世 : 초기 세계

01

02世 : 윤선지(尹先之), 공신공

공신공(功臣公). 가문의 공신 계열을 이은 2世.

02

03世 : 윤금강(尹金剛), 복사공

복사공(福事公). 3世로 가문의 맥을 이음.

03

04世 : 윤집형(尹執衡), 문정공

문정공(文定公). 문(文)의 덕목을 갖춘 4世.

5世 : 윤관(尹瓘),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은 파평윤씨(坡平尹氏) 5世로,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입니다. 고려 예종 때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은 명장으로, 파평윤씨(坡平尹氏) 가문을 역사에 빛낸 최고의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의 후손들은 이후 수많은 파(派)로 분파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관직 : 문신,무신
시대 : 고려 1,040년(정종6)~ 1,111년(예종6)

경기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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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광탄면 분수리에 묘가 있다. 자는 동현, 호는 묵재, 본관은 파평(坡平),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신달(辛達)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집형(執衡)의 아들이다.

고려 문종(文宗)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 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하고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 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예종2년(1107)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케하였다.

윤관(尹瓘)은 문무(文武)를 겸한 공신으로 예종6년(1,111)에 돌아가자 1,130년(인종8)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되었다.

고려 예종(睿宗)때 여진정벌의 공을 세운 명장 윤관(尹瓘)의 묘로 묘역전체 규모가 상당히 크고 웅장하며 봉분과 석물이 단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다. 봉분아래는 장대석 모양의 호석(護石)을 두르고 봉분뒤로 담장을 둘러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봉분정면에 상석(床石)이 놓여있으며 왼쪽에 묘비가 서있다. 한계단 아래에 양쪽으로 망주석과 상석 전면에 사각의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장명등을 중심으로 각각 양편에 동자석,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마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묘역 아래에는 윤관장군의 영정이 봉안돼있는 여충사(麗忠祠)가 자리하고 있다.

여충사(麗忠祠) - 문숙공(文肅公) 묘소 성역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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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충사(麗忠祠)는 분수재라고도 일컬으며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는 선조 문숙공의 묘소와 사당 및 교자총 등이 있는 우리 파평윤문의 성역이며 호국유적지이다.

문숙공(文肅公)의 묘소는 고려 경종6년(서기1,111년)에 예장한 것인데 이조 연산군 당시에 파주 군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수렵지구로 삼았으며 또 병화가 잦았던 탓으로 수호가 소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종가가 미약한 틈을 타서 일시 세도만 믿고 심모(沈某)가 몰래 투장하였기 때문에 실전되었던 것이다.

청송심씨 가문에서는 광해군6년(서기1614년)경부터 현종3년(서기1662년)까지 동안에 묘 후에도 새 무덤을 투장한 바가 있었다. 문숙공(文肅公) 묘소의 곡장을 헐어 내고 묘비를 파손하여 묻었기 때문에 그 후에 우리 선인들이 심묘(尋墓)에 부심(腐心)하였으나 좀처럼 단서를 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영조 계미년(癸未-서기1763)에 이르러 심문(沈門)에서는 그 투장한 사실을 더욱 은폐하기 위하여 심지원의 무덤 앞에 있는 고총(古塚)을 작은 무덤으로 사초(莎草)하면서 다른 곳에 있는 이호문(李好文)의 고비(古碑)를 옮겨다 그 고총 앞에 세운 것을 우리 종중에서 발견하고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호문의 후손되는 자를 추궁한 결과 심문(沈門)에서 토지를 사 주면서 "그 고총이 자기 조상의 무덤이라고 사칭하고 제사를 지내 달라"면서 청탁하기로 그 고비를 주었다는 사실을 실토받기에 이르렀다.

그와 동시에 묘하 길 옆에 있는 토분을 파헤쳐 그것이 종중 문헌에 전해오는 교자총(교자<轎子>는 여진 정벌 당시에 임금께서 하사<下賜>하였던 수레)에 틀림없음이 확인되었다.

종전부터 그 고총은 『윤시중의 분묘』라는 전설이 없지 않았던 것이나 고증이 없었던 차에 이모(李某)의 실토와 교자총을 발견하여 그 고총이 문숙공(文肅公)의 분묘에 상위(相違)없음이 비로소 현실로 확인된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이 입증되자 종중에서 회의를 거듭한 끝에 좌윤(左尹) 면교(勉敎)公이 선두에 나서서 영조대왕 앞에 상소하였고 좌상(左相) 동도공(東度公-後에 영의정<領議政>)이 국왕에게 직접 상주한 일이 있다.

영조대왕은 이 사건을 경기 감사에게 처리하라고 명령을 내리셨는데 비석과 지석 등이 없으므로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이호문(李好文)의 고비(古碑)를 제거시키고 양가에서 그대로 수호하라는 판정을 내렸을 뿐이었다.

우리 종중에서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순응할 수가 없었으므로 다시 현장을 답사하다가 그 고총 좌편 10보밖에 있는 도랑창에 묘비를 묻었다는 옛 노인(古老)의 전언을 듣고 그 곳을 파헤쳐 드디어 문숙공의 묘비를 깨뜨려 묻었던 묘비 조각을 발견하였다. 상황이 그렇게 진행되자 좌상 東度공께서는 다시 국왕에게 아뢰어 문숙공(文肅公)의 분묘를 고제(古制)대로 개봉축하고 문숙공(文肅公)의 묘소도 심호(尋護)하도록 하는 어명을 앙청(仰請)하였던 것이다.

영조대왕은 그 상주에 접하여 『천도(天道)가 소소(昭昭)하며 후손들의 성의가 지극하여 천년 고비를 찾았으니 주군(州軍)을 동원하여 문숙공(文肅公)의 묘는 종전대로 봉안할 것이며, 심지원(沈之源)도 정승을 지낸 왕실의 외가이니 동산소(同山所)하라』는 비답(批答)을 내리셨다

그것은 영조 임신년(壬申-서기1764) 5월이었는데 주군(州軍)이 동원되어 심지원의 무덤 앞을 깎아내고 문숙공(文肅公)의 분묘를 크게 봉안하였던 것이다.

그때 영조대왕은 예관을 보내어 문숙공(文肅公) 묘전에 치제(致祭)하시었다.

그렇게 되어 심가의 세 무덤은 그냥 남아 있게 되었으며 선조 문숙공(文肅公)의 묘소는 영구히 실전되었다.

그 산송(山訟) 당시에 종중에서 나가셨던 도사(都事) 희복공(熙復公)(시조 24세손 남원파<南原派>)은 국왕 앞에서 불경한 언사가 있었다는 죄과로 벌을 받고 장독으로 종명(終命)되었다. 그때 심정최(沈廷最)도 투장한 죄목으로 처벌되었던 것이다.

심지원(정승<政丞>)은 그 조부의 무덤을 투장했을 뿐만 아니라 서기1663년경에 자신도 문숙공(文肅公)의 분묘 뒤에 투장되었던 것이며, 3백여년이 지난 1950년 6.25동란 당시에는 미군 폭격기들의 폭격에 의하여 심지원의 분묘에 폭탄 두발이 떨어져 분묘가 파헤쳐지고 비석이 파손되어 달아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문숙공(文肅公) 묘 뒤에 투장한 죄악에 대한 천벌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심묘(尋墓) 당시에 종중의 성금으로 와가(瓦家) 구간(九間), 초가(草家) 팔간(八間)의 묘사를 짓고 위토답(位土畓) 29두락(斗落)과 전(田) 5일정(日耕)을 매입하였다.

그 후 손조5년(서기1805년)에 이르러 유사(有司) 곡씨(穀氏) 주관으로 제청(祭廳)으로 와가 14간을 신축하여 이를 분수재(汾水齋)라 칭하였다.

철종3년(서기1852년)에 묘소의 사초를 다시할 때에 토산종인(兎山宗人) 승원(承源)氏가 위토전(位土田) 일일경작(一日半耕)을 헌납하였다. 그리고 서기1856년에는 영풍군(鈴豊君) 찬公의 주관으로 제청과 묘사를 크게 보수하였다.

그 후 왜정말기 세계대전 당시에 묘역의 송목(松木)을 전부 강제 공출 당하게 되어 수백년 조림한 송목이 전부 벌채에 처하게 되었다.

그 때에 시조 31세손 석훈(奭勳)씨가 군수(郡守)에게 교섭하여 재실 건축용 임목(林木)만을 넘겨받아 당시 경성에서 개업하고 있었던 의학박사 치형(致衡)씨의 성금 5천원(千圓)과 기타의 성금으로 현재의 재사(齋舍)를 개축하였다. 단 행랑은 1959년 당시 대종회장의 주관으로 건축하였다. 묘사는 수시 보수되어 왔으나 퇴락되었기 때문에 서기1972년에 철훼하고 당시 대종회장의 주관으로 묘사를 개축하였다.

분수영당(汾水影堂)은 서기1932년 종약장(宗約長) 용식태(容植台)(판서<判書>) 당시에 석훈(奭勳), 석도(錫濤) 양씨(兩氏) 주관으로 황해도 옹진 종문의 성금 일만원(一萬圓) 기타의 성금 등으로 신축하고 문숙공(文肅公)의 영정을 봉안하게 되었다.

영정은 함경남도 북청 만뢰사(萬賴祠)에 옛부터 봉안되어 있는 장군복 영정을 묘사해다가 모셨고 문관복 영정은 그때 새로 그려서 봉안한 것이다.

교자총은 문숙공(文肅公)께서 여진 정벌 당시에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수레를 매각(埋却)한 것인데 철종12년 개성유수 교성공(敎成公)이 개수립(改竪立)한 교자총비가 있다. 또한 심묘(尋墓)시 견문록에 따르면 묘소의 청룡(靑龍)밖에는 전마총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곳은 여진 정벌때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전마(戰馬)를 묻은 곳이라고 전한다.

문숙공(文肅公) 신도비는 서기1966년에 시조34세손 경수(敬秀)氏의 독담(獨擔)으로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문학박사 노산(鷺山) 이은상씨(李殷相氏) 찬(撰)이요, 시조35세손 석오(錫五)氏의 서(書)이다.

심묘(尋墓) 당시에 곡장(曲墻)을 쌓지 못하였고 상석(床石) 묘비(墓碑) 문관석(文官石) 및 망두석을 갖추었을 뿐이었는데 서기1968년 석훈(奭勳)씨가 대종회장에 취임하여 3년간에 걸쳐 각 종문의 성금으로 곡장(曲墻)을 쌓고 무관석(武官石) 장명등 양마석(羊馬石) 동자석등 많은 석물을 새로 갖추었고, 상석은 시조32세손 기주(起柱)氏의 헌금에 의해 큰 것으로 갈아 놓았다.

그때 영당과 재실도 보수하고 영당 앞에 작은 연못을 팠으며 그 주위에 9성(九城)의 표석을 세웠다.

묘산은 노송 4주(四株)(현재는 2주<二柱>)가 있었는데 1956년경에 유사가 재실(齋室) 수리비에 충당한다는 구실로 매각한 것을 종인 태길(泰吉)氏가 그 대금 일만 이천원(圓)을 돌려주고 보호한 것이다.

문숙공(文肅公)의 묘소는 서기1972년에 지방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파주군수가 관리책임자로 되어 있다.

분수재(汾水齋) 문숙공(文肅公) 묘산(墓山)은 13정보인데 실묘(失墓)되었던 당시는 심가(沈家)가 투장하면서 관리하여 오다가 심묘(尋墓)된 후에도 그 묘하에 그들이 거주하여 관리하였던 모양이다.

조선조 당시는 사패지로 받지 않으면 산림은 국유이었고 개인 소유는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묘하에 우리 종인이 거주하지 않았던 탓으로 산림은 심가(沈家)들이 관리한 성 싶다.

분수원 묘산은 심문(沈門)에서 투장하고 사패지(賜牌地)로 받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심묘후에도 임야 소유권 문제로 분쟁이 계속되어 왔다.

그런데 일정초기에 심가측에서 소유권 확인 청구소송을 제기하였으며 당시의 판사가 우리 종중에서 증거로 제출한 국왕의 치제문을 채택하여 그 임야는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소유로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왜정초기 일제 강점이 되던 을사조약 그 무렵에 심가의 종손 심인구(沈麟求)가 그 묘산의 송목을 대금 7백원(圓)을 받고 일본인에게 매각한 사실이 있었다. 우리 종문에서는 묘하에 거주자가 없었던 관계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그 매매를 소개한 신석일(申錫一)이가 구전관계로 불평을 품고 우리 종중 유사 희배(喜培)氏에게 밀고한 사실이 있다. 그러자 유사 희배(喜培)씨가 고발하여 심인구는 구속되고 종중유지 30여명의 연서로 당시 초대총감(이등박문)에게 진정하여 이등박문의 명령으로 그 소목 매매는 해약된 바가 있다.

그 후에 심치겸(沈致謙), 심치량(沈致亮) 양인이 언필칭(言必稱) 그 송목은 자기네 심씨가 이백여년간 조림한 것이므로 심씨 소유로 인정해 달라는 소유권 확인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던 것인데 결국 수석판사는 『지난달 국왕으로부터 윤문숙공(尹文肅公)의 묘산 송림으로 확증한 것이므로 심씨 소유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하여 우리 종중에서 승소함으로써 그 묘산은 현재 우리 종중 소유로 등기되어 있으며, 비록 동산소(同山所)라 할지라도 심가의 소유는 일평도 없는 실정이다.

한편 대종회장 남의(南儀)氏가 취임한 후 1976년 11월21일 개최된 종문 총회에서 우리 종족의 오랜 숙원인 문숙공(文肅公) 동상 건립이 결의되고 곧이어 문숙공(文肅公) 기념사업회가 발족하자 백만 종친의 열성적인 참여와 각계각층의 협찬을 받아 마침내 1980년 5월 8일 각계인사 및 전국 종친 2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역사적인 문숙공(文肅公)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와 아울러 5대사적 현창사업도 연차적으로 확대 추진되어 1978년부터는 우리의 성역인 분수재의 정화공사가 정부의 호국유적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이미 2억2천만원이 투입되어 일차 공사로 사당 및 홍전문신축, 재실이축, 신도비 위치변경, 진입로, 주차장 조성 및 민가철거를 위한 역사가 시행되었다. 현재에도 묘역전체에 걸친 조경 등 이차 공사가 정부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또한 사당에 봉안되는 새 문숙공(文肅公) 영정이 문화부 위인선열영정심의위원회에서 표준영정으로 제정 확정되어(폭 100cm, 길이 178cm) 문화부 추천으로 일랑(一浪) 이종상(李鍾祥) 화백(畵伯) 집필(執筆)하에 완성을 보았다.

이제 통일로 주변에 위치한 우리 문숙공(文肅公) 묘소 및 사당 일원의 묘역은 우리 종문의 성역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민족정기와 국토통일의 상징으로써 길이 보존 수호되어야 할 국민적 성역으로서도 숭앙(崇仰)의 대상이 되어 1987년 12월 10일 국가사적 제323호로 지정받았다.

상서대(尙書臺)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웅담리 330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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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대(尙書臺)는 파평산 동편 파주시 법원읍 웅담리 330번지에 있는데 문숙공(文肅公)께서 수양정(修養亭)으로 쓰신 별저(別邸)가 있던 유서 깊은 유허지(遺墟址)로써 파주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숙공(文肅公)께서 여진 정벌을 하시고 개선하셔서 별저로 쓰시던 곳이며, 장내(墻內)에는 친히 식수하신 괴목 수주가 있었다고 하며 상서대 옆에는 연못이 있어 공께서 독서와 낚시를 즐기시며 심신을 휴양하시던 곳이기도 하다.

문숙공(文肅公)께서 여진 정벌을 마치고 개선할 때 여진국인(女眞國人) 웅단(熊丹)이란 여인이 따라와서 정성껏 시중을 받들다가 문숙공(文肅公)께서 서기1,111년 5월8일에 하세하신 후 못 옆 암상(岩上)에 올라가 통곡하고 못에 투신 순사한 사실이 있어 이곳을 그 후 웅담(熊潭)이라고 명명하고 동명(洞名)도 웅담리(熊潭里)라고 하였으며 그 바위를 낙화암(落花岩)이라고 하였다.

파주군사(坡州郡史)에 보면 거수명목사기(巨樹名木史記)에 둘레가 11척 수고(樹高)가 30척이나 되는 괴목 2주가 있는데 웅담리의 괴목은 상서대 장내의 정목(亭木)이니 고려왕조의 공신이신 윤문숙공(尹文肅公)이 식수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이 두 나무는 임진왜란때 병화(兵火)로 죽었던 것인데 1주만 다시 소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도 밝히고 있다.

장내(墻內)에는 상서대(尙書臺)라고 각한 비석이 있고 종중에서 그 장내에 墻을 설치하고 문강공이하 5위 등 6위의 비위(碑位)를 모시고 추원단(追遠壇)이라고 하였으며 그 후 상서공(尙書公)과 충간공(忠簡公) 2위를 추배(追配)하였으며, 현재는 文康公(諱 彦頤), 侍郞公(諱 惇信), 留守公(諱 商季), 錄事公(諱 復元), 御史公(諱 純), 文顯公(諱 珤), 代言公(諱 安적), 良簡公(諱 安淑), 寺令公(諱 輔), 判書公(諱 莅), 鈴平君(諱 陟), 忠簡公(諱 承順) 등 12位의 선조님들의 碑를 모시고 있다.

고종때 연천에 사는 박경선(朴慶善)이란 者가 단소 위 삼리허(三里許)에 작답(作畓)하고 인수로(引水路)를 개설하려고 괴목 1주를 벌목하려 하였으나 우리 종중에서 이를 금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경선은 그때 우리 종중을 무시하고 인부를 시켜 강제 벌목하려 하였으나 성사하지 못했다. 박경선은 그래서 우리 문중을 모해코자 尹家들이 역모를 꾀하여 허설제천(虛設祭天)하고 있다고 당국에 밀고하였다. 당시 영의정인 김좌근(金佐根)이 포장(捕將) 김병국(金炳國)을 시켜 조사한 바 문강공(文康公)의 제단(祭壇)임이 판명되어 무사히 넘겼다. 영의정 김좌근은 박경선을 무고죄로 흑산도에 귀양을 보냈던 것이다.

박경선의 아들 박원중은 그 후 원한을 품고 상서대를 봉퇴시키려고 단하에 또다시 수로를 개설하려 하였는데 파주군내 유림들이 상소하여 영의정 김좌근이 박원중을 함경북도 경원으로 귀양을 보내 무사했던 것이다.

그 후 1960년(庚子年) 4월 추원단을 광축(廣築)하고 낙화암 위에 비석을 세우고 초혼(招魂)해서 웅단(熊丹)할머니의 혼을 위로하고 위령제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추원단 제향(祭享)은 매년 음10월2일에 거행하였으나 태사공(太師公) 묘소 추향일과 문숙공(文肅公) 묘소 추향일이 변경됨으로써 1979년부터는 음10월6일로 제향일을 정하였다가 음력 3월10일에 행사한다.

6世 분파 : 윤언인(尹彦仁) · 윤언식(尹彦植) · 윤언이(尹彦頤)

윤언인(尹彦仁)

윤관(尹瓘)의 장남
이후 7世:윤덕첨(尹德瞻) → 8世:윤위(尹威) → 9世:윤극민(尹克敏) → 10世:윤돈(尹敦)
→ 11世:윤희보(尹希甫)-①함안파
→ 11世:윤영찬(尹英贊)-②남원파로 분파

윤언식(尹彦植)

윤관(尹瓘)의 차남
이후 7世:윤평수(尹平壽) → 8世:윤종문(尹宗文) → 9世:윤은형(尹殷衡)-③덕산군파(德山君派)로 분파

윤언이(尹彦頤), 문강공(文康公)

윤관(尹瓘)의 삼남
이후 7世:윤인첨(尹麟瞻)장남, 윤자고(尹子固)차남, 윤돈신(尹焞信)3남,시랑공(侍郞公)

6世 : 윤언이(尹彦頤), 문강공(文康公), 계열

1

07世 : 윤인첨(尹麟瞻)

윤언이(尹彦頤)의 아들(장남)
④문정공파(文定公派)로 분파

2

07世 : 윤자고(尹子固)

윤언이(尹彦頤)의 아들(차남)
8世:윤인직(尹仁直)-⑤신령군파(新寧君派)로 분파

3

07世 : 윤돈신(尹焞信)

윤언이(尹彦頤)의 아들(3남)
시랑공(侍郞公)

7世 : 윤돈신(尹焞信) 시랑공(侍郞公)

윤돈신(尹焞信), 시랑공(侍郞公)

윤언이(尹彦頤)의 3남 계열로, 이후 여러 파의 조상이 되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후손 계보

윤돈신(尹焞信),시랑공(侍郞公)
→ 8世:윤상계(尹商季), 유수공(留守公)
→ 9世:복원(尹復元), 록사공(錄事公)
→ 10世:윤순(尹純), 어사공(御史公)
→ 11世:윤보(尹珤), 문현공(文賢公) 으로 이어짐.

8世~11世 : 유수공 · 록사공 · 어사공 · 문현공

1

08世 : 윤상계(尹商季)

유수공(留守公)

2

09世 : 윤복원(尹復元)

록사공(錄事公)

3

10世 : 윤순(尹純)

어사공(御史公)

4

11世 : 윤보(尹珤)

문현공(文賢公)

11世 : 윤보(尹珤)이후 5형제로 12세 분파

12世 : 윤안적(尹安적)

윤보(尹珤)의 장남, ⑥대언공파(代言公派)로 분파

12世 : 윤중조(尹中珇)

윤보(尹珤)의 차남, ⑦봉록군파(奉祿君派)로 분파

12世 : 윤안숙(尹安淑)

윤보(尹珤)의 3남, 양간공(良簡公)
장남 13世 : 윤리(尹莅)
차남 13世 : 윤척(尹陟), 영평공(永平公)

12世 : 윤암(尹諳)

윤보(尹珤)의 4남, ⑮소부공파(少府公派)로 분파

12世 : 윤안비(尹安庇)

윤보(尹珤)의 5남, ⑯태위공파(太尉公派)로 분파

12世 : 윤안숙(尹安淑), 양간공(良簡公)

윤안숙(尹安淑)은 양간공(良簡公)으로, 문현공(文賢公) 윤보(尹珤)의 아들입니다. 그의 후손들은 13세 윤리(尹莅)와 윤척(尹陟)으로 이어지며, 이후 여러 파로 분파됩니다.

13世 : 윤척(尹陟) 계열, , 영평군(永平公)

14世 : 윤승휴(尹承休)

윤척(尹陟)의 장남
⑩전의공파(典儀公派)로 분파

14世 : 윤승순(尹承順), 충간공(忠簡公)

윤척(尹陟)의 차남
슬하에 3남 : 윤곤(尹坤), 윤목(尹穆), 윤향(尹向)

14世世 : 유승례(尹承禮)

윤척(尹陟)의 3남
⑭판도공파(版圖公派)로 분파

14世 : 윤승순(尹承順) 충간공(忠簡公) 계열

15世 : 윤곤(尹坤)

윤승순(尹承順)의 장남
⑪소정공파(昭靖公派)의 파조(派祖)

15世 : 윤목(尹穆)

윤승순(尹承順)의 차남
⑫원평군파(原平君派)의 파조(派祖)

15世 : 윤향(尹向)

윤승순(尹承順)의 3남
⑬소도공파(昭度公派)의 파조(派祖)

15世 : 윤곤(尹坤), ⑪소정공파

소정공(昭靖公) 윤곤(尹坤)은 ⑪소정공파(昭靖公派)의 파조(派祖)이시다.

윤승순(尹承順)의 아들로, 그의 후손들은 이후 문천군수공파(文川郡守公派)를 비롯한 여러 방파(房派)로 이어지며 오늘날 파평윤씨(坡平尹氏) 소정공파(昭靖公派) 후손 모두의 중시조이시며 우리 문지리 종친회의 직계 조상이 되신다. 우리 종친회 채(采)자 항렬의 20대조(代祖) 이다.

공(公)께서는 시조 태사공(太師公) 신달(辛達)의 14세손(世孫)이 되고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10세손(世孫)이자 문강공(文康公) 언이(彦頤)의 셋째 아들인 시랑공(侍郞公) 돈신(焞信)의 후손이며 충간공(忠簡公) 승순(承順)의 3남(곤坤,목穆,향向) 중 장방이다.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윤씨의 부친 정정공 윤번(尹璠, 판중추원사)의 사촌형이다.

소정공(昭靖公) 윤곤(尹坤)의 묘

공(公)께서는 시조 태사공(太師公) 신달(辛達)의 14세손(世孫)이 되고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10세손(世孫)이자 문강공(文康公)(尹彦頤) 언이의 셋째 아들인 시랑공(侍郞公) 돈신의(尹焞信) 후손이며 충간공(忠簡公) 승순(承順)의 3남(곤坤,목穆,향向) 중 장방이다.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윤씨의 부친 정정공 윤번(尹璠, 판중추원사)의 사촌형이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의 부친 윤호(우의정)의 조부이며 세종의 서녀 정현옹주의 부군 윤사로, 성종때의 문신 윤필상(영의정)이 증손이 된다. 공의 生時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고려 말엽 젊은 나이에 동생 소도공 향(向)과 함께 등제하여 모두 문학으로서 조정에서 중책을 맡았으며 무관의 관직을 겸하는 등 화려한 관직을 거친 전형적인 귀족 관료였다.

태조 7년 (1398년)에 대장군이 되고 당시 은서모로 만든 갑옷을 바쳐 임금한테 오승포 1백필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태종실록 15권, 1398년12월 12일)

[은서모: 족제빗과의 포유류. 몸의 길이는 14~25cm이며 꼬리 길이는 6~7cm로 식용육 중에서 가장 작다. 겨울에는 온몸이 흰색이고 여름에는 등이 엷은 붉은 갈색으로 바뀐다. 이와 같은 작은 동물의 가죽과 털로 만드니 그 정성과 공이 가히 짐작이 간다.]

이것은 윗대 선조가 새 왕조에 불복한 것에 대한 화해로 이해 할 수 있다. 이미 대장군 위치에 있던 윤곤(尹坤)은 이성계와의 관계가 있었으나 위화도 회군에는 직접 관여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종 2년에 역신 박포(朴苞)가 방간(芳幹) 부자를 끼고 정안군을 제거코자 군사로써 대궐을 범하므로 공은 상장군 이저(李佇)등과 함께 태종을 도와 토벌하여 진압하였다.(2차 왕자의 난) 태종이 왕위에 오른 원년(1401년)정월에 추충익대좌명공신 3등 제6인에 책록되고 파평군으로 봉군 되었다. .

또한 충성을 다하여 힘썼다는 공으로 왕이 교지로 표창하고 부모처자에 직함을 내리고 전답과 노비, 은과 비단, 말 등을 하사 했으며 둘째 동생 목(穆)은 4등에 막내동생 향(向) 또한 높은 벼슬에 올랐다.

그 해 2월 마암단 아래에서 공신들이 모여 피를 뽑아 마시며 왕께 충성을 맹세했다 한다.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 태종이 사위(嗣位) [사위(嗣位): 사위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정상적인 왕위 계승의 형태로 선왕(先王)의 승하(昇遐)에 의한 즉위 형태이다. 선왕이 생존해 있는 상태에서 왕위를 잇는 경우 선위(禪位)라 했고, 반란을 일으켜 선왕을 왕위에서 끌어내린 후 오르는 경우 반정(反正)이라 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같이 나라를 개창하여 왕위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를 받았다는 것을 고하는 뜻을 전달하고 돌아와 왕이 말(馬)을 내려주고 청화정(淸和亭)에서 위로연을 베풀고 전답과 노비를 하사했다고 한다.

당시 명나라에 갔을 때 우리나라의 말(馬)을 교역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상마(上馬)는 비단 네필, 중마는 견적(絹績) 10필로 정하였던바 이후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숫자를 모자라게 계산하여 정산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임금이 진상을 알고 죄로써 다스리되 공신이므로 벼슬만 파면토록 하여 고향인 파평현으로 안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복귀 하였다.

태조4년(1395년) 11월에 개국, 정사, 좌명공신들이 대청관북(大淸觀北)에서 회합하고 합심협력 할 것을 다짐 했는데 참여자가 66명에 달했으며 왕은 옷감을 하사하고 잔치를 베풀어 위로했다 한다.

세종 즉위 후 평안도 관찰사(평안감사)를 지냈다. 당시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보시고 임금께 상소하여 기악을 없애고 풍속과 교화를 바로 잡으시라고 건의하고 공께서는 이를 실천했다.

그 후 이조판서로 종1품에 오르시고 후에 우참찬을 역임했다.

세종 4년(1422년) 3월 11일 자택에서 별세 하셨다.(세종실록 15권) 태조께서는 내시 김중귀를 보내고 왕은 예관을 보내 제사케 했으며 시호를 소정(昭靖)이라 내렸다. 윤곤(尹坤)이 세상을 떠나자 실록에는 “파평군 윤곤(尹坤)이 돌아가시니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 두 임금이 행재소에 있다가 부음을 듣고 고기와 생선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태상왕(이성계)은 그를 부원군에 임명하지 못한 것을 슬퍼했다.

그 제문에 “도량이 크고 너그러우나 자르듯이 분명하고,현명하고 슬기로우나 까다롭지 않다. 은대에거 임금을 돕고 주목의 장이 자주되다. 관서지방을 순문하여 올바르게 바로 잡았다. 가는 곳마다 빛나는 명성이 있도다.”라고 하여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 이렇듯 성품이 너그럽고 온후하며 풍채가 있었다고 한다. 공신으로서 부귀를 누렸으니 세상에서 복노인(福翁)이라고 일컬었다. 용의가 아름다워 소(昭)라고 하고 마음이 너그럽고 고종명하여 정(靖)이라고 했다” [세종실록 15권, 1422년 3월 11일/파평군 윤곤의 졸기]

슬하에 유씨 부인 사이에 희이(希夷), 희제(希濟) 형제를 한씨 부인 사이에 삼산(三山)과 1녀를 두어 모두 3형제를 보았다. 아들의 이름을 절조를 바라는 뜻에서 백이, 숙제의 이름을 따서 지었고 삼산은 수양산의 일명으로 고려를 사모하고 절의를 존중하는 뜻에서 명명했다고 한다. 이들 3형제 이외 가로(加老), 석년(石年), 지인(之仁), 지의 (之義)라는 이름이 족보에 올랐는데 이들의 경력은 따로 언급되지 않았다. 이중 지인과 지의는 진주와 경주 등지로 나갔다고 전한다. 문천군수공파(文川郡守公派) 집안에서 소장한 가승에는 가로, 석년, 지인, 지의는 서자(庶子)로 기록되어 있다.

첫째 부인 고흥 류씨는 첨의 정승 류탁의 여식이고 뒤의 청주한씨는 예문관 대학사 문열공 한상질의 여식으로 한상질의 아들 한기(韓起)는 한명회의 아버지로 공은 한명회의 고모부가 된다. 후에 공의 증손인 윤사로의 장남이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의 언니와 혼인하여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공(公)은 윤목(尹穆), 윤향(尹向) 등 남동생과 여동생이 4명 있었다. 공의 매부는 판한성 지위에 있던 청주한씨 한상환, 사공을 지낸 왕미, 부제학을 지낸 밀양박씨 강생이고 막내 매부인 동래정씨 구(矩)는 선경판관이었고 그 부친 정양생은 고려의 시중이었다. 이렇듯 매부의 집안이 모두 권문세가였다.

동생 윤목(尹穆)은 방간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이 왕에 오르는데 기여한 공로로 익대좌명공신 4등에 책록 되었다. 1405년 9월에는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07년에 평양부윤이 되었다. 후에 민무구 옥사에 연루되어 1409년 진주로 귀양 갔다가 그 곳에서 별세 했다. 족보에는 부인이 정씨로만 기록되어 있고 후사의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

둘째 동생 윤향(尹向)은 1367년에 출생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1404년 종3품 지사간원사 자리에 올랐다. 그 해 10월에 공주로 유배 갔다가 1405년 7월에 사헌부 집의에 복귀했다. 이듬해 7월에는 입직대언을 지내고 8월에는 우부대언으로 옮겼다.

1407년 7월에 이조참의, 9월에 사헌부 대사헌, 10월에 한성부윤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에 전라도 관찰사, 완산부윤,참지 의정부사 등을 역임했다. 1409년 11월에는 태종의 명을 받아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러 갔다. 1412년에 다시 한성윤으로 임명되고 1413년 12월 공조판서, 1415년 5월 형조판서, 6월에는 호조판서로 임명되었다. 그 후 태조 이성계에 관한 불손한 이야기를 했다하여 1415년 11월에 파직되어 쫓겨나기도 했다. 1416년 12월에 다시 등용되어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었다.

1417년 3월에는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당시 임금이 예전 일을 상기 시키며 말조심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그만큼 친근했다는 뜻이다. 그해 5월 경상도 관찰사로 전근되고 5월 24일 병조판서로 임명됐다.

1417년 12월 태종은 윤향(尹向)을 다시 등용해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1월 26일 윤향의 셋째아들 윤계동과 태종의 딸 정신옹주와 혼인함으로써 사돈관계가 되었다. 다음 달 중순 윤향(尹向)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표문을 가지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병이 들어 요동 지방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형인 윤곤(尹坤)과 처제 공안부윤 홍여방이 그를 만나 보러갔다고 기록되어있다.

태종실록 35권, 1418년 5월 17일 형조판서 윤향(尹向)의 졸기에는 평양에서 별세한 것으로 기록하고 “윤향(尹向)은 용의가 공손하고 아름다워 젊어서부터 훌륭한 명예가 있었다. 고담준론을 좋아하고 일찍부터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쳤다.

세상을 떠날 때 나이가 45세였다. 소도(昭度)라는 시호를 받고 쌀과 콩 각 50석과 종이 150권을 부의하고 중관을 보내 장례를 치렀다고 실록에 기록하고 있다. 윤향(尹向)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소도공파(昭度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소정공(昭靖公)의 묘소는 파주시 파주읍 연풍리 (용지동)에 있으며 유적건조물중 둘레석 등이(상석과 향로석은 근래에 교체) 경기도 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하에는 사당과 신도비가 있다.

매년 음력 3월 11일 불천지위중구제를 파주시 파주읍 용주골 묘전 재실에서 개최된다.

16世 : 상호군공 · 한성공 · 영천부원군

윤희이(尹希이)

소정공의 장남, 상호군공(上護軍公)

윤희재(尹希濟)

소정공의 차남, 한성공(漢城公)

윤삼산(尹三山)

소정공의 3남, 영천부원군(永川府院君)

16世 : 윤희제(尹希齊), 한성공(漢城公)

공(公)은 소정공(昭靖公) 윤곤(尹坤)의 둘째 아들로 한성공파((漢城公派)의 파조(派祖)이시며 우리종친회 채(采)자 항렬의 19대조이다.

공(公)께서는 1380년에 태어나 1455년에 첨지통예문사에 제수되고 1465년 검한성부윤이 됐다. 정헌대부 호조판서를 역임 [호조판서 역임: 1447년 실시한 식년시에 생원으로 급제한 윤필상에 대한 사마방목에 조부의 관직이 판서로 기록되어 있다.] 하고 1467년에 별세하시니 향년 88세다. 공은 크게 현달한 후손 덕분에 사후 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판한성부사로 증직되었다.

삼촌인 윤목(尹穆)이 태종 9년(1409년)의 세자에게 “임금이 날 좋아하지 않으면서 왜 세자를 돌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한 말 때문에 임금에 대한 불충이라 하여 국문을 받고 곤장을 맞은 후 멀리 유배된 일도 있었다.

그 일로 한성공(漢城公) 윤희제(尹希齊)는 족친이라는 이유로 1410년에 제주와 광주로 귀양을 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조 초기에 왕실과 혼인을 맺었고 여러 공신을 배출한 집안으로 3형제는 문음으로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음서에 의한 관직을 얻게 된 것은 한성공(漢城公)의 6촌인 정희왕후가 세조의 왕비가 된 이후였다.

동생 삼산(三山)은 1442년 사헌부의 장령에 제수됐는데 역시 세조 즉위 후 형들처럼 1453년에 판통예문사로 있다가 1455년에 종2품의 겸병조사에 올랐다.

부인은 연안차씨로 부친은 문정공 창성 호는 설암이다. 후 부인은 남양홍씨로 검찬찬 감이다. 슬하에 5형제(경, 은, 증, 배, 훈)을 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여동생 3명과 庶子인 감(堪)이 더 있다.

형인 경(坰)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종실록의 편수관으로 기주관의 역할을 했고 “조산대부(朝散大夫 議政府舍人 臣 윤 경)이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 종4품직에 해당하는 벼슬을 한 것으로 보이고 도총부 도총관, 이천부사, 공조참판을 역임했다. 족보에는 백천군수 직함과 추충적덕병의 보조공신이면서 대광보국숭록대부, 파평부원군으로 기록되어있다. 그에게 주어진 정1품이라는 높은 벼슬은 조카인 윤은의 아들 윤사로가 세종의 사위가 되어 얻은 벼슬로 추정된다. 아들인 윤필상이 급제하면서 사마방목에 부친의 관직이 의정부 좌참찬이고 증 영의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생 증(增)은 부사를 역임했고 둘째동생 배(培)는 장령과 도승지를 지냈다. 충남 노성지역의 노성윤씨로 일컫는 장령공 배는 대통령 윤석열의 19대 할아버지다.

셋째동생 훈(壎)은 목사(牧使)를 지냈다.

한성공(漢城公)의 매부인 경주김씨 민강은 직장을 역임했고 고성이씨 민연은 참판을 지냈고 광산정씨 종설은 군수를 지냈다. 그 부친은 장령을 지낸 정지하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입암리에 있다. 옛날에 실전 되었다가 숙종 37년 겨울에 연천에 사는 종인 원교(元敎)가 산소자리를 구하던 중 산하에서 발견된 묘표석을 근거로 되찾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우리집안 가승에는 長湍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향후 연구 과제다.

17世 : 배천공 · 참의공 · 부사공 · 장령공 · 목사공

윤경(尹坰), 배천공

윤희재(尹希濟)의 장남

윤은(尹垠), 참의공(參議公)

윤희재(尹希濟)의 차남,
참의공(參議公) 아들 9명이 소정공9방파 시작

윤증(尹增), 부사공

윤희재(尹希濟)의 3남

윤배(尹培), 장령공

윤희재(尹希濟)의 4남, 윤석열의 19대조(代祖)

윤훈(尹훈), 목사공

윤희재(尹希濟)의 5남

17世 : 윤은(尹垠) 참의공 구방파(參議公 九房派)

공(公)은 한성공 희제(希齊)의 둘째 아들이시며 우리 종친회 채(采)자 항렬의 18대조(代祖)이다.

공(公)께서는 세조 즉위 원년 (1455년) 원종공신 [원종공신: 국가나 왕실의 안정에 공훈이 있는 정공신(正功臣)외에 왕을 수종(隨從)해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 공신의 대부분이 정공신의 자제 및 사위 또는 그 수종자들에게 녹훈되었다.] 3등에 녹훈 되었다. 당시 임금은 교서를 내려 “1차급을 더해주고 자손은 음직을 받고 후세에까지 유죄(宥罪) [유죄(宥罪) : 죄를 지으면 그 죄를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는 것.] 한다. 공신가운데 통정대부 이상은 자손, 형제, 생질, 사위 중 한사람을 자원에 따라 산관(散官), 1자급을 더해주고 자손은 음직을 더하여 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조선실록 2권 1455년 12월 27일)

세조 3년 공조참의로 제수되었다.(세조실록 6권 1457년 2월 20일) 세조 4년 2월에는 공은 좌참찬 박중손과 함께 형조참의 윤 은이 임금에 아뢰기를 “정인지는 성상께 무례하였으니 고신만을 거두었으나 법대로 조처 하소서”라고 청하자 임금은 “단지 명예를 구하고 스스로 높은체 하였을 뿐이며 본시 뜻이 없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이 파주탄현면 오금리 박씨들의 입향조인 박중손과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한 학자 정인지 등은 공(윤은)과 동일 세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세조 4년 (1458년 2월)에는 다시 공조참의에 제수되고 같은 해 10월 12일에 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가 다시 형조참의로 제수 되었는데 실록에는 윤 은은 영천부원군 윤사로의 아비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세조실록 15권 1459년 1월 4일)

세조5년 7월 3일 판광주목사로 임명 되었고 이듬해 임지에서 이질로 별세하니 향년 87세다.

참의와 광주목사를 역임한 공께 주어진 정1품이란 높은 벼슬은 장남인 사로 (師路)가 세종의 사위가 되면서 얻은 벼슬로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우의정 영천부원군이 되었다. 이로써 長房가문은 엄청난 부와 영예를 거머쥐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한양 4대문안의 네 번째 가는 부자였다고 한다.)

묘소는 충청도 신창현 남도고산 동둔내리(현 아산시 도고면 도산리)에 있다. 도산재(道山齋)에 배향되어 있다. 부인은 용인이씨로 안성군부인으로 증직되고 부친은 보훈랑예빈판관 이수상(守常)이다. 슬하에 9남(사로, 사석, 사유, 사화, 사공, 사하, 사건, 사연, 사맹)과 2녀를 두어 구방파로 불린다.

장남 사로(충경공 執義公 字 과옹, 혹은 주옹)는 세종 18년에 세종의 딸인 정현옹주와 결혼하였다. 세조 2년 육신(六臣)이 죽임을 당할 때 참여한 공로로 수충동덕 좌익위사공신 1등이 되고 병조판서와 의정부좌찬성을 역임했다. 41살에 돌아가셨으며 장단군 장북면 도룡동에 묘소가 있다. 시흥시 산현동의 영충사와 안산시 선부동에 안산병사가 있어 그곳에서 향사하고 있다.

둘째 사석(집의공 執義公)은 사헌부 집의를 역임했으나 연산조시 거듭되는 사화로 현인군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사모와 관복을 찢어버리고 청주 옥화대로 내려가 은거 하며 문인들과 학문에 몰두했다 한다. 공의 묘소는 유성 반석동에 있으며 신도비와 만경정이 있다.

셋째 사유(군수공 郡守公)는 영월군수와 한성좌윤을 역임하고 예조참판에 올랐다. 묘소는 장단군 장북면 대곡산 자원이며 경남 창녕 남지읍 아지리에 모은정과 추원재가 있다.

넷째 사화(별좌공 別坐公)는 별좌를 거쳐 가선대부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슬하에 4남을 두었다. 묘소는 천안시 성거면 오색당좌곡장등간원에 있다.

다섯째 사공(사정공 司正公) 사헌부 사정을 지냈으나 무후였다.

여섯째 사하(통례공 通禮公) 우리 종친회의 직계로 다음에 자세하게 소개한다.

일곱째 사건(사직공 司直公) 사헌부의 사직을 역임 했으며 경남 합천군 가회면 함발리 구평에 입향조를 기리는 구음재와 춘우정, 매계서당이 있다. 자식이 없어 통례공 사하의 둘째아들 연(硏)을 입양했다.

여덟째 사연(호군공 護軍公)은 호군을 역임 했으며 전북 정읍시 입안면 접지리, 신면리 등에 후손이 세거한다.

막내인 사맹(어모공 禦侮公)의 최종 관직(품계)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었다. 어모장군은 조선시대 정3품 당하관 무관에게 주어지던 품계이다. 이에 따라 후손들이 그 관직명을 따서 '어모공(禦侮公)'이라 높여 부르며 칭경하게 되었다. 종종 기록에 따라 무관직인 사과(司果) [사과(司果): 조선시대 오위에 둔 정6품의 무관직] 직을 역임했던 것으로도 나타난다. 2남을 두어 충남 당진시 합덕읍 운산리에 그 후손들이 세거한다.

첫째사위는 經歷을 지낸 김신언이며 둘째 사위는 검지를 지낸 광산김씨 거(据)이다.

18世 : 소정공(昭靖公) 9방파 개요

소정공((昭靖公) 윤곤(尹坤)의 후손들은 18세에 이르러 9개의 방파(房派)로 분파됩니다.
각 방파는 소정공의 직계 후손으로 구성되며, 참의공(參議公) 윤은(尹垠)의 아들 9명이 소정공9방파로 시작되며 각 종친회의 핵심 계보를 이룬다.

1방파 — 師路 (사로)

충경공(執義公). 소정공-2방파 파조.
참의공(參議公) 윤은(尹垠)의 아들(장남)

2방파 — 師晳 (사석)

집의공(執義公). 소정공-2방파 파조.
참의공(參議公) 윤은(尹垠)의 아들(차남)

3방파 — 師有 (사유)

군수공(郡守公). 소정공-3방파 파조.
참의공(參議公) 윤은(尹垠)의 아들(3남)

4방파 — 師華 (사화)

별좌공(別坐公). 소정공-4방파 파조.
참의공(參議公) 윤은(尹垠)의 아들(4남)

5방파 — 師貢 (사공)

사정공(司正公). 소정공-5방파 파조.
참의공(參議公) 윤은(尹垠)의 아들(5남)

6방파 — 師夏 (사하)

통례공(通禮公). 소정공-6방파 파조.
참의공(參議公) 윤은(尹垠)의 아들(6남)

7방파 — 師騫 (사건)

사직공(司直公). 소정공-7방파 파조.
참의공(參議公) 윤은(尹垠)의 아들(7남)

8방파 — 師淵 (사연)

호군공(護軍公). 소정공-8방파 파조.
참의공(參議公) 윤은(尹垠)의 아들(8남)

9방파 — 師孟 (사맹)

어모공(禦侮公). 소정공-9방파 파조.
참의공(參議公) 윤은(尹垠)의 아들(9남)

18世 : 윤사하(尹師夏) 통례공(通禮公) 소정공-6방파

18世 사하(師夏)는 통례공으로, 소정공-6방파의 파조(派祖)입니다.

참의공(參議公) 윤은(尹垠)의 6남 아들로, 이후 19세 염(磏)·연(硏)·려(礪)·질(𥑇)·탕(宕) 등으로 이어집니다.
염(磏)은 경기도파주시 탄현면 문지리에 군수공파를 형성하고, 탕(宕)은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에 목사공파를 형성합니다.

공(公)은 참의공(參議公) 윤은(尹垠)의 6남 아들로 9방파중 6방이며 통례공파(通禮公派) 후손 모두의 파조(派祖)이다.

공(公)께서는 1436년 참의공(參議公) 윤은(尹垠)의 9남 2녀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배움과 덕행이 출중하여 음서직으로 군자녹사로 벼슬을 시작하게 됐다. 1473년 6월에는 충훈부경력(忠勳府經歷)으로 근무했고 1475년 1월에는 선농제에 참여한 군신(50여명)에 임금이 하사한 아마(兒馬)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직급은 전랑이었다.(성종실록 51년, 1475년 1. 25.) 임금의 명을 받아 사섬부정으로 충청도의 재목을 벌채하여 대창과 공주(公主)의 집을 짓도록 하기도 했다.(성종실록 77권, 1477년 윤 2월)

1483년에는 장단부사를 역임했다. 1530년 북변의 취약한 성보를 구축하라는 임금의 명을 받고 사업을 완성한 후 돌아오시는 길에 병환으로 금성현에 도착하여 별세하니 향년 58세이다.

통훈대부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로 추증되었다.
부인은 강릉김씨로 부친은 봉사(奉事) 진(瑱)이다. 조부는 지평 양남(揚南)이다. 통례공의 묘지와 떨어져 있던 것을 최근 500년 만에 합장했다.

후손의 세거지인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에 전해지는 구전에 의하면 부인께서 시집오신 후에 원인 없이 병색이 짙어지자 친정으로 보내 병을 치료하고 오라 했는데 며칠 안 되어 돌아 왔는데 갈 때 한 채였던 가마가 돌아 올 때는 세 채의 가마에 밥그릇과 국그릇 등 놋그릇이 그득했다고 전해지며 청렴한 관리의 뒷일을 공의 처가인 강릉 김씨 집안에서 보살폈던 것으로 보인다. 부인께서는 체구도 컸다고 전해진다.

슬하에 5남(염磏, 연硏, 려礪, 질𥑇, 탕宕)을 두었다. 묘소는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에 있으며 신도비와 재실이 있고 윤탕(尹宕)의 손자인 죽재공 윤인함(형조참판, 경주부윤)의 후손들이 세거한다.

19世 : 윤염(尹磏) 문천군수공(文川郡守公)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공(通禮公) 윤사하(尹師夏)의 장남
파주시 탄현면 문지리 문천군수공파(文川郡守公派)의 파조(派祖)이시며 현재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선영에 모시고 있다. 매년 11월말 시제로 봉양함

문천군수공(文川郡守公)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공(通禮公) 윤사하(尹師夏)의 장방인 윤염(尹𥖝)은 문천군수공(文川郡守公)계 우리 윤문의 세파조(細派祖)이시다.

공(公)께서는 윤사하(尹師夏) 통례공(通禮公)의 5남(염, 연, 려, 질, 탕) 2녀중 장방이다.

성종조에 관직에 올라 중종조를 거쳐 문천군수[문천군: 함경남도 남부에 있는 군으로 동쪽은 영흥만(永興灣)을 사이에 두고 동해에 임하고, 서쪽은 평안남도 양덕군, 서남쪽은 황해도 곡산군, 남쪽은 원산시와 강원도 이천군, 북쪽은 고원군에 접하고 있다.] 를 역임하고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정3품)로 증직했다. 연산조에 들어와 연산필화(燕山筆禍)사건 [연산필화사건: 연산군 폭정시 연산군을 모함하는 글을 한글로 써서 한양 곳곳에 붙인 자가 있어 그 범인을 잡으려고 4대문을 걸어 잠그고 한양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조사하였으나 잡지 못하자 4대문 밖의 글을 아느자를 조사하는 과정에 모진 고문으로 수백명이 죽었다. 식자우환(識者憂患)이란 말이 이때 생겼다.] 등으로 모두 벼슬을 버리고 혹은 화에 연좌되어 귀양 가는 격동의 시대로 문천군수를 끝으로 낙향하였다.

동생 려(礪)는 충남 장기로 질은 경북 영천으로 다섯째 탕(宕)은 당시 당숙 윤필상 [윤필상: 조선전기 좌찬성,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윤곤(尹坤)의 증손이며 윤희제(尹希齊)의 손자다.아버지는 윤경(尹坰)이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지난 성종 때에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尹妃)의 폐위를 막지 않았다고 추죄(追罪)되어, 진원(珍原)의 유배지에서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의화에 연좌되어 안협(강원도 이천 지역의 옛 지명, 철원 북방 지역)으로 귀양 갔다. 윤 염의 출생과 사망 기록, 재임 시기 등은 우리 족보에 조차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막내인 탕(상주목사)의 과거급제 기록, 재임 시 중종실록의 기록 등 여러 사정을 참작해 볼 때 출생 시기는 1450년 초반일 것으로 추정된다.

1515년(중종10년) 4월 24일의 중종실록에 의하면 대사헌 권민수 등이 상소하기를 윤 염(尹𥖝)이 직책을 오로지 아전에게 일임하는 것을 논핵하니 “적지 않은 호적 사무를 아전에게 일임하고 자신이 검찰(檢察)하지 않았으니 그 잘못이 크다. 다만 이것은 공죄(公罪)이므로 내가 사죄(私罪)로 다스리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파면시키는 것은 과중하니 송서(送西)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라며 윤허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가 문천군수 말년으로 추정된다.

부인은 창원 공씨이며 장인은 습독을 지낸 孝老이고 할아버지는 서령(署令)을 지낸 숙(淑)이고 외조는 지돈녕을 지낸 여흥 민씨 식(軾)이다.

슬하에 1남3녀를 두어 장남은 직장공(直長公) 봉종(奉宗)이고 사위는 해평 윤씨 희학, 청주한씨 규(後室), 進士 청주곽씨 양(良)이다.

묘소는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 통례공(通禮公) 선영에서 2017년 7월 12일에 진동면 동파리 종중묘역으로 이장됐다.

공(公)의 첫째 동생 연(硏)은 七房인 숙부, 사건(師騫)의 子로 출계되어 충좌위사맹(忠佐衛 司猛)을 역임하고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합천군 가회면 함발리 구평에 후손이 세거한다.

둘째 동생 려(礪)는 과천현감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세종시 장군면 하봉리로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50여호, 종회장 윤승현, 이장 윤노현) 현감공의 신도비와 사당을 건립하여 신위를 모시고 있다.

셋째 동생 질(𥑇)은 부정(副正)을 역임하고 병의(兵議)로 증직 되었다. 묘소는 영천시 금호읍 삼호리에 있으며 그곳 묘하와 청도군 석천면 금전리,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운남리 등에 후손들이 세거 한다. 넷째 동생 탕(宕)은 1507년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 필선, 교리등을 거쳐 상주목사를 역임하고 도승지 직제학에 증직되었다.

공(公)께서는 귀양(당시 진사)지에서 복귀후 등과하여 중종반정 이후에 벼슬길에 올랐다. 공(公)께서는 상주목사 재직 시 임금께 건의 하여 관직에 오른 사람이 쓰는 망건 위에 쓰도록 하는 탕건을 제작하여 썼다고 한다. 당시임금(중종)은 윤탕(尹宕)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의 이름을 딴 탕건으로 명명 되었다고 한다.

탕건 유래비가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와 달성군에 있으며 공께서는 청근(淸勤)하고 염명(廉明)했다고 상주명신신람에 기록되어있다. 후손은 대구 달성군 다사면 문산동 세거한다.(1,300여호) 그 외 안성 삼죽면 대정리, 용인 남사면 청리, 이동면 송전리, 평택시 용이동 등에 세거하여 막내 동생의 가문이 5형제 중 번창 하였다.

누이동생은 백천조씨 조권의 아들 조장손(趙長孫)에 시집갔다.

종중묘 배치도

19世 : 문천군수공(文川郡守公) 윤염(尹磏)의 묘

문천군수공파(文川郡守公派)의 묘역 전경

문천군수공파(文川郡守公派)의 묘역 전경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소재

문천군수공(통례공 산하, 소정공6방파) 20世~23世 계보

1

20世 : 윤봉종(尹奉宗)

직장공(直長公), 19世 윤염(尹磏) 문천군수공의 아들(子)

2

21世 : 윤길(尹吉)

감정공(監正公), 20世 윤봉종(尹奉宗) 직장공의 아들(子)

3

22世 : 윤수민(尹壽民)

대사헌공(大司憲公), 21世 윤길(尹吉) 감정공의 아들(子)

4

23世 : 윤양(尹讓)

대사성공(大司成公), 22世 윤수민(尹壽民) 대사헌공의 아들(子)

20世 : 윤봉종(尹奉宗) 직장공(直長公, 通政大夫, 字 子重)

직장공(直長公) 윤봉종(尹奉宗)은 우리종친회 채(采)자 항렬의 15대조로 문지동의 입향조(入鄕祖)이다.

공(公)께서는 己酉1489년 3월 10일생으로 중종(中宗)5년, 庚午1510년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에 51위로(100명 선발) 등과했다.

성균관 진사, 상의원 [상의원(尙衣院) : 조선시대 동반 경관직 정3품 아문 관서로 임금의 의복을 진상하고, 대궐 안의 재물과 보물 일체의 간수를 맡아보는 일을 담당하였다. 소속 관직은 정(正), 첨정(僉正), 판관(判官), 주부(主簿), 별좌(別坐), 별제(別提), 직장(直長) 등이다. 관사의 위치가『전선지(全鮮誌)』(순종연간 편찬)에는 돈화문 앞에 있다(在敦化門前)고 기록되어 있다.] 직장 등을 역임하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으로 증직했다. 비문에 行 통훈대부 상의원 직장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행수법(行守法) [행수법: 조선시대 품계와 관직이 일치하지 않은 관원에게 주던 칭호, 관직이 품계보다 낮은 경우를 ‘行’, 관직이 품계보다 높은 경우를 ‘守’라 하였다.] 에 의한 아래 품계의 직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 재임 시에는 소격서 [소격서: 조선시대 초기 이래로 초제(醮祭)를 행하던 관청인 소격서의 혁파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소격서는 하늘에 제사 지내고 별에 기도하는 도관(道觀)으로 이곳에서 행하여지던 의식은 고려 시대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널리 행해지던 것이었으므로 유학을 배타적으로 숭상한 조선조의 역대 제왕들도 함부로 중단하지 못하였다. 중종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일을 가볍게 없앨 수 없다고 허락 치 않다가 조광조(趙光祖) 등 신하들의 간청에 못 이겨 부득이 없애게 되었다.] 혁파를 주장하며 3일에 걸쳐 임금에 상소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종실록, 중종 25년, 1530. 5. 15.) 공께서는 좌승지로 증직 받으셨는데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도승지(비서실장) 다음의 벼슬로 품계는 정3품이다. 겸직한 경연참찬관은 중종 35년에 창설된 글을 강(講)하고 사상을 토론하는 일을 맡은 경연청의 관직으로 영사, 지사, 동지사, 참찬관, 시강관, 시독관, 검토관, 사경, 설경, 전경 등이 있다.

공(公)께서는 戊戌 1538년 1월 19일 돌아가시니 향년 50세이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제용감정을 지내고 이조참판으로 증직한 吉이고 사위는(첫째딸) 무송윤씨 玉이다. 윤옥은 중종 26년 사마시에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 좌승지, 남양부사, 양주목사, 부평부사, 해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공조참판,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부총관을 지냈다. 그의 딸이 순회세자(順懷世子)의 빈(德嬪)이 됨으로써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었다.

둘째 딸은 전주이씨 億祥에 시집갔다. 이억상은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동수(薪仝守) [薪仝守: 관료들의 녹봉을 관리하던 직위]를 지낸 이부정(李富丁)이고, 아버지는 영창부수(永昌富守) 이연동(李連同)이다. 1544년(중종 3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검열, 지평, 장령, 사섬시정(司膽寺正), 판교(判校), 예조참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파평윤씨(坡平尹氏) 문천군수공파(文川郡守公派)가 문지리(文智里)에 사패지(賜牌地)를 하사받은 교지를 어느 문헌에서도 확인하지 못했으나 문중의 구전으로 전해지는 입향조(入鄕祖) [입향조(入鄕祖): 어떤 마을에 맨 먼저 정착한 사람이나 조상] 인 윤봉종이 문지동, 축현리 일대의 사패지(賜牌地)를 [사패지(賜牌地): 사패지는 종실, 왕비의 겁령구(怯怜口), 재추(宰樞), 호종신료(扈從臣僚)와 같은 왕의 측근과 권세가에게 주로 지급되었다. 그리고 궁원(宮院), 응방(鷹坊) 등의 권력기구와 공신들에게도 주어졌다] 하사 받게 된 것은 임금(중종)의 측근에서 보좌하는부처인 宮院(상의원)에서 봉직한 공로가 있었고 큰 할아버지인 윤사로(尹師路)가 세종의 사위인 점과 공의 사위 윤옥의 딸이 순회세자의 빈(덕빈)이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다른 설은…

공(公)의 묘소는 문지리 선영(능안말)에서 2011년 6월 11일에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종중 묘역으로 이장됐다. 부인은 안동 김씨로 父는 현감을 지낸 김계함이고 조부는 판서를 지낸 효소공 작(碏)이다. 공(公)의 후손이 파주 탄현면 문지리에 세거한다.



[윤봉종(尹奉宗)의 소격서 철폐 상소기록문]

종중묘 배치도

20世 : 직장공(直長公) 윤봉종(尹奉宗)의 묘

직장공(直長公), 감정공(監正公), 대사헌공(大司憲公) 3인 묘

직장공(直長公), 감정공(監正公), 대사헌공(大司憲公) 3인 묘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소재

21世 : 윤길(尹吉) 감정공(監正公, 嘉善大夫, 字 德一)

감정공(監正公) 윤길(尹吉)은 직장공(直長公) 윤봉종(尹奉宗)의 장남으로 우리종친회 채(采)자 항렬의 14대조이다.

공(公)께서는 壬午1522년생으로 41세인 1562년(명종17) 임술(壬戌) 별시(別試) 병과(丙科) 3위로 급제하였다.

1575년(선조8년) 3월 내섬시정(內贍寺正) [내섬시정(內贍寺正): 조선시대 각 궁(各宮)‧각 전(各殿)으로 공급하는 물품과 이품(二品) 이상 관원에게 하사하는 술 및 일본과 여진에 보내는 음식물과 직조물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내섬시(內贍寺)의 정삼품(正三品) 의 관직이다] 과 같은해 3월에 인천 도호부사를 [천도호부사: 미추홀을 포함한 지역으로 인천문화사에 의하면 역대 시장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역임하고 별좌(別坐),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제용감정(濟用監正): 조선시대 제용감(濟用監)은 잡직서(雜織署)라고도 부르는 이 관청으로 모시, 마포, 나사, 능난 등 옷감을 맡아보고 또한 직조에 관한 일을 주관하는데 관직으로는 정, 부정, 첨정, 판관, 주부, 직장, 봉사, 부봉사, 참봉 등이 있다. 正은 정삼품(正三品) 당하관(堂下官)으로 정원은 1인이다] 지냈다. 가선대부 (嘉善大夫)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의 품계로 가의대부(嘉義大夫), 가정대부(嘉靖大夫), 가선대부(嘉善大夫)등이 있다] 이조참판 겸 경연참찬관, 의금부사,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提學), 춘추관과 성균관의 지사, 세자시강원의 좌부빈객으로 증직되었다.

行 통훈대부 제용감정으로 기록되어 있어 종2품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1577년(선조 11) 2월 국장도감낭청 [국장도감(國葬都監): 조선 시대 국왕이나 왕후의 상사(喪事)가 있을 때 그 장례 행사를 주관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임시 기구로 낭청은 축문, 제례 등을 주관하고 낭송하는 일로 목청이 좋은 사람으로 지정했다] 으로서 국장(國葬) 발인 시 병을 이유로 나오지 못하자 사헌부의 논죄를 당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인 (임오년, 1578년) 병사(病死)하니 향년 56세이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진동면 동파리로 이장됐다.

부인은 한양 조씨이며 장수하여 82세시 선조임금이 베푼 장수연(長壽宴)에 참석하기도 했다. (선조실록 38년 4월 9일) 그 후 6년을 더 사시고 88세에 돌아가셨다. 부인의 조부는 현령을 지낸 조원강(趙元綱)이며 부친은 당시 사림파의 거두 조광조(기묘사화시 사사, 영의정추증)의 형 조영조(趙永祖, 사헌부감찰, 이조참판추증)이다.

종중묘 배치도

21世 : 감정공(監正公) 윤길(尹吉)의 묘

직장공(直長公), 감정공(監正公), 대사헌공(大司憲公) 3인 묘

직장공(直長公), 감정공(監正公), 대사헌공(大司憲公) 3인 묘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소재

22世 : 윤수민(尹壽民), 대사헌공(大司憲公, 嘉善大夫, 字 仁叟)

대사헌공(大司憲公) 윤수민(尹壽民)은 감정공(監正公) 윤길(尹吉)의 장자로 우리종친회 채(采)자 항렬의 13대조이다.

공(公)께서는 1555년 乙卯생으로 약관 28세인 선조15(1582년)에 사마시 61위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선조16년(1583년) 알성문과에 병과 2위(12명선발)로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하였다.

선조20년(1587년) 승정원 주서(注書)직을 제수 받은 지 오래지 않아 병장(病狀)을 내고 체직 되었다가 파직된 바도 있다.

임진왜란(1592년)이 발발하자 파산관 [파산관(罷散官): 조선시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산계(散階) 즉 직급만을 유지한 벼슬아치를 말한다] 상태로 있었기에 편모(당시71세)를 모시고 경기도로 피난 갔다가(문지리로 추정) 당시 순찰사 권징(權澂)의 막하로 들어가 종군 하였다. [권징(權徵): 선조19년(1586년)형조참판이되고 전후해서 충청,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병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서인 정철이 실각할 때 당여(黨與)로 몰려 평안도관찰사로 좌천되고 임진왜란시 경기관찰사로 특별 임명되어 임진강을 방어해 왜병의 침략을 막으려 했으나 패배했다. 1593년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했으며 그뒤 공조판서가 되고 1594년 병으로 물러났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선조29년(1596년) 정평(定平)부사로 제수되어 목민업무를 담당했다. 선조 33년 2월에는 필선(弼善)을 시작으로 우정언, 장령, 집의, 세자시강원 겸 필선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청요직 [청요직: 학덕과 문벌이 높은 자가 받는 관직으로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원들을 일컫는 말. 통칭 이조전랑(吏曹銓郞)은 직급은 정5품에서 종6품 밖에 안 됐지만 대신인 이조판서를 견제하기 위해 인사권을 위임한 탓에 실세 자리가 되었다. 당상관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청요직의 경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을 역임했고 이듬해인 선조34년에 양주목사에 제수되었다. 다시 사간 집의를 맡았고 당시 전란 중 왕을 호종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체직을 청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조 37년(1604. 5. 22.) 동부승지로 같은 해 (8. 26.) 좌부승지로 10월에는 우승지로 선조 38년에는 병조참의를 역임하다 이후 강원도감사로 제수되어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실록복원과 보관을 위해 오대산을 조사하기도 했다. 선조 39년 3월에 춘천부사가 되었고 광해군 즉위 후 연안부사, 예조참의, 대사간, 의금부 동지사를 역임하고 광해군 9년에 예조참판에 올랐다.

광해군 11년에는 우윤 [우윤: 한성부에는 판윤을 최고행정책임자로 하고 부책임자로 종2품관인 부윤(府尹) 2인을 두었는데, 1466년(세조 12) 관제를 개혁하면서 부윤을 좌윤과 우윤으로 하였다. 지금의 서울시 부시장이다.] 으로 같은 해 5월에는 사헌부 대사헌 [대사헌: 사헌부의 장관(長官). 종2품직. 시정(施政)을 논하여 바르게 이끌고, 백관(百官)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는 등의 일을 맡았음. 지금의 검찰총장(공수처장 포함)] 에 제수되었다. 1617년 1월에는 동 의금부사로서 왕명을 받들어 실도사를 거느리고 종로, 동대문, 남대문의 길가에 백패(白牌)를 써 붙이기도 했다.

대사헌(大司憲) 역임 시 인목대비 폐모론에 동조하여 서궁을 유폐시키는 일에 앞장섰으며 『폄손절목』[폄손절목: 1619년 (광해군 11) 인목대비를 강등하여 서인(庶人)으로 하자는 주장] 제정에 관여했다.

가선대부,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증직되었다. 공은 선조조(宣祖朝)의 선무원종공신(宣務原從功臣)이다.

공(公)께서는 평소 조정에서 정사를 논할 때 겸손한 면모를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파주군지 파주 인물편)

공(公)의 부인은 청주 한씨로 都事를 지낸 한극창이다.

공(公)께서는 효성이 지극하여 왜란 시 홀어미를 모시느라 임금을 호송치 못했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성품이 강직하여 대사헌 직무 수행 시에도 혐의자를 추국, 국문 하면서 인피하거나 피혐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차에 걸쳐 파직 할 것을 임금에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기도 했다.

1605년 선조임금이 70세 이상의 사대부의 노친을 위한 잔치를 베풀 때 모친이 82세로 참여했다.(선조실록 38년 4월 9일)

기미년 (1619년)에 향년 64세로 사망하여 문지리 선영에서 2011년 6월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로 이장되었다.

공(公)께서는 2남 1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대사성을 지낸 양(讓)이고 차남은 한산군수를 역임한 근(謹) [근(謹): 윤수민의 차남으로 묘소는 통례공 선영하에서 2022년 5월 21일 경주시 서면 천촌리 후손묘역으로 이장 했으며 그의 아들 4남(응선, 응남, 응민, 응주)의 후손 대부분이 경주시 서면 천촌리, 영천시 북안면 효동 등에 세거하고 있다] 이다.

근(謹)의 묘소는 연천군 청송면 백의리 문천군수공(文川郡守公) 염(磏)의 묘하에서 경주시 서면 천촌리 후손의 선산으로 2022년 5월 21일 이장했다. 서녀(庶女)는 전주이씨 원길(元吉)에 시집갔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


종중묘 배치도

22世 : 대사헌공(大司憲公) 윤수민(尹壽民)의 묘

직장공(直長公), 감정공(監正公), 대사헌공(大司憲公) 3인 묘

직장공(直長公), 감정공(監正公), 대사헌공(大司憲公) 3인 묘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소재

23世 : 윤양(尹讓) 영평군(領平君) 대사성공(大司成公)

영평군(領平君) 대사성공(大司成公) 윤양(尹讓)은 우리종친회 채(采)자 항렬의 12대조로 현존하는 문천군수공파(文川郡守公) 자손 모두의 할아버지다.

24世 - 윤효생(尹孝生), 군수공(郡守公)

윤양(尹讓)의 장남, 후손 - 종가댁, 적성댁

24世 - 윤효영(尹孝永), 장령공(掌令公)

윤양(尹讓)의 차남, 후손 - 쇄재댁, 양근댁


공(公)께서는 癸酉1573년생으로 26세에 선조32(159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선조35(1602년) 승문원 박사로 관계에 진출하였다.

1603년 임진병란으로 조선왕조실록 일부(춘추관, 성주, 충주 분장 분)가 소실됨에 따라 이의 복원을 위한 신인본 실록 편수관으로 참여했다.(명종실록1권신인본) 선조 37년(1604년 9월) 성균관전적, 지평문학에 그해 11월에는 판중추부사로 제수되고 이 때 현릉참봉(顯陵參奉)으로 파견되어 현릉의 관리를 맡기도 했다. 이어 사간원 헌납, 시강원 사서, 세자시강원, 문학, 성균관 전적, 장령, 시강원 필선, 보덕, 사간, 집의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 하였고 선조 40(1607년)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사간 오백령(吳百齡, 이조참판, 성균관대사성)과 동서지간이 되어, 상피법(일정한 친족 간에는 동일한 관서나 직속관계에 있는 관서에서 함께 근무할 수 없도록 한 법)으로 교체되었다.

그 뒤 부사직(副司直), 집의를 거쳐 광해즉위 원년에 필선으로 제수되었고(당시 오백령은 동부승지) 이후 보덕, 사간, 부수찬, 승지 등의 직을 역임하고 광해군 3년, 1611년 8월 4일 大司成에 올랐다.

광해군 즉위 시 임해군(臨海君) 관련 옥사 때 문사낭청(問事郎廳) [문사낭청: 일명 문랑(問郎)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각종 재판은 의금부·형조·한성부·사헌부 및 각급 지방 관아의 상설 형정 기관에서 관장하였다. 문사낭청은 국청·정국·성국·의금부가 주관한 추국(推鞫) 등의 때 차출되어 위관(委官)·의금부당상·형방승지의 지휘를 받아 도사(都事)와 함께 죄인의 국문에 참여하고 문안의 작성 등 실무를 담당하였다.] 으로서 참여한 공으로 익사원훈(翼社元勳) [익사원훈공신: 1613년(광해군 5) 임해군(臨海君)의 역모사건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 의 공신에 들었고, 영평군(鈴平君)으로 봉군되었다.

공(公)께서는 선조말(선조39년,1606년)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유영경: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 이이첨·정인홍의 탄핵을 받고,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1608년 사사(賜死)되었다.] 필두로 한 소북 [소북(小北): 광해군때에 북인(北人) 가운데 유영경(柳永慶), 남이공(南以恭), 김신국(金藎國) 등을 중심으로 한 분파. 선조 때 북인인 홍여순(洪如淳)이 대사헌이 되려고 할 때 같은 북인인 남이공이 반대하면서 홍여순 파와 갈라졌다. 윤양은 북인의 명사로 북인이 서인과 남인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북인 정권은 인조반정으로 몰락하였다] 에서 직제학을 지낸 김대래(金大來) [김대래:광해군이 즉위하여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大北派)가 세력을 잡게 되자 양사(兩司)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즉, "그는 유영경(柳永慶)의 심복으로서 온갖 도의에 어긋난 일을 모의하였는데, 일찍이 적자(嫡子)도 아니요 장자(長子)도 아니라는 말을 공공연히 떠들어대어 감히 왕의 존엄성을 범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마침내 종성에 유배된 뒤 1608년 사사(賜死)되었다] 와 함께 서로 탄핵하였다.

당시 차기 임금을 두고 집권 북인중에 영의정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는 광해군을 지지하고 영창군이 태어나자 후임 영의정 유영경을 중심으로 한 소북파는 영창군을 지지했다. 소북은 청북(淸北)과 탁북(濁北)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윤양은 청북, 김대래는 탁북에 속하였다.

광해군일기 26권(1610년 3월 9일)에 의하면 “윤양과 김대래는 모두 유영경 시절의 명사였다. 윤양이 일찍이 대래더러 부황하고 행검(行檢)이 없다고 탄핵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대래가 다시 청반(淸班)에 오르자 시론(時論)은 둘다 그대로 두었고 윤양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래가 영경을 위하여 허준(許浚)의 일 [허준이 서얼 출신으로 정3품인 당상관의 승격을 반대 하던 일] 로 윤양이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이 때문에 대래는 죽게 되었으나 윤양의 청망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당초 유영경의 당(黨)을 소북 [소북(小北): 광해군때에 북인(北人) 가운데 유영경(柳永慶), 남이공(南以恭), 김신국(金藎國) 등을 중심으로 한 분파. 선조 때 북인인 홍여순(洪如淳)이 대사헌이 되려고 할 때 같은 북인인 남이공이 반대하면서 홍여순 파와 갈라졌다. 윤양은 북인의 명사로 북인이 서인과 남인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북인 정권은 인조반정으로 몰락하였다.] 이라고 호칭하였는데 소북중에 또 청북과 탁북이 있었다. 대개 그 중에서 다소 강직하여 스스로 염치가 있다고 하는 자를 사람들이 청북이라 칭하니 윤양과 같은 무리였고 그 나머지를 탁북이라고 이르니 대래와 같은 무리였다. 유영경이 국가의 일을 담당하였을 때에는 형적(形跡)이 다르지 않았었는데 그가 패하고 나자 그의 죄를 논핵하였으니 그 계책이 치밀하다 하겠다. 지금 나와서 조정의 권력을 잡은 자들은 대개 이른바 청북이고 그 중에 혹은 탁북으로서 청북에 간 자가 있으니 의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를 가르켜 영경의 잔당이라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광해군 일기에서 보듯 김대래가 유영경을 위해 허준(許浚)의 일로 혐의를 받자 공께서 이론을 제기하여 김대래를 사사케 했고, 유영경의 죄를 논핵 하기도 했다. 광해군 즉위 후 유영경이 사사되자 청북과 탁북의 상당수는 윤양과 함께 광해군을 옹립했다.

임해군 옥사에도 간여하였고, 인조반정 후 삭훈(공훈이 삭제됨), 파직되었다. 辛亥 1611년 8월 29일 돌아가시니 향년 39세이다.

공(公)께서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연유는 당시 같은 북인파 유영경, 김대래가 사사(賜死)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광해군일기(정초본 143권, 광해 11년, 1619년 8월 26일)에 의하면 충훈부가 영평군 윤 양의 상례를 돕는 일에 대하여 계문하였는데 아뢰기를 "친공신(親功臣)이 부모의 상을 당하면 전부터 해조에서 상사(喪事)를 돕고 상여를 멜 군정을 제급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지금에 고 영평군(鈴平君) 윤양(尹讓)의 부모가 연이어 죽었는데, 국가에서 공신을 우대하는 뜻이 본인의 생몰에 따라 다르게 되어서는 안 되니, 윤 양의 상례를 돕는 일을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한다고 전교 하였다.”라고 기록 된 것으로 보아 부친인 대사헌공 수민과 모친인 청주한씨는 1619년 한해 돌아 가셨으며 공께서는 부모님에 앞서 돌아가셨으며 당시 부친장례는 지금의 국가장(國家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公)의 삭훈파직 이후 영평군(領平君) 작위에 대해 문중에서조차 호칭하지 못하다가2022년 10월 문중 시제 시 종중회장 윤명채의 제안으로 영평군(領平君) 작위 복원 고유제(告由祭)행사를 치른바 있다. 부인은 남원 양씨로 오백령 [오백령: 1618년(광해군10)에 폐모론의 정청(庭請: 세자, 또는 삼정승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궐에 대사(大事)를 알리고 임금의 명을 기다림)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파직되고, 성 밖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형조참판에 기용되고, 이어 도승지·대사간·이조참판·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괄(李适)의 난 때에 왕을 공주에 호종한 공으로 승급되었다. 윤양과는 동서지간이다.] 의 재실인 남원양씨와 자매지간이다. 부친은 첨지, 중추부사를 지낸 양사행이다. 슬하에 효생(孝生), 효영(孝永) 형제를 두었다.

종중묘 배치도

23世 : 대사성공(大司成公) 윤양(尹讓)의 묘

대사성공, 군수공, 장령공, 통사랑공, 동덕랑공 5인 묘

대사성공, 군수공, 장령공, 통사랑공, 동덕랑공 5인 묘

24世 : 윤효생(尹孝生) 군수공(郡守公 字 而達陰)

군수공(郡守公) 효생(孝生)은 종손댁과 적성댁 채(采)자 항렬의 11대조(代祖)이다.

이후 계보

1

25世 : 윤정면(尹廷冕)

통사랑공(通仕郞公)
24世:윤효영(尹孝永-쇄재댁)의 차남으로 양자옴

2

26世 : 윤천휴(尹天休)

동덕랑공(通德郞公)
25世:윤정면(尹廷冕)의 아들(子)

3

27世 : 윤인증(尹仁曾)

26世:윤천창(尹天昌-양근댁) 차남으로 양자옴
종가댁과 적성댁으로 분파

—

공(公)께서는 己丑1589년생으로 회덕현감으로 부임하여 재직 중(당시 29세) 광해 10년, 1618년, 비변사에서 도적을 놓친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후 괴산군수를 역임하고 통훈대부로 증직 되었다.

인조14년(1636년) 병자호란 시 남한산성에 머물다 강화도로 피난 간 임금을 호종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20여년간 현감, 군수를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광해군 일기에는 비변사가 아뢰기를 회덕(懷德) [회덕: 지금의 대덕의 옛지명으로 대덕은 대전과 회덕의 한자씩을 따서 지은 지명이다] 에 사는 유학 송원조(宋元祚) 등 30명이 연명으로 본사에 정장을 하였는데 “현감 윤효생(尹孝生)은 자상하고 청렴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였으므로 전 감사가 이미 포장할 것을 장계하였는데, 지금 도적이 달아난 일 때문에 파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쌀 1백 석을 바치겠으니 유임시켜주소서.” 라고 윤허를 요청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전시 대덕구 문화원에서 발행한 대덕문화총서11호(2007년)에 의하면 부임일은 알 수 없으나 36대 현감으로 재직하였으며 자상하고 청렴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인은 선산 임씨이며 장인은 예조좌랑을 지낸 임현이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동생인 효영(孝永)의 둘째아들 정면(廷冕)을 입양 했다.

1648년 10월 2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0세이다. 문지리 선영에서 진동면 동파리 종중 묘역으로 이장됐다.

종중묘 배치도

24世 : 군수공(郡守公) 윤효생(尹孝生)의 묘

대사성공, 군수공, 장령공, 통사랑공, 동덕랑공 5인 묘

대사성공, 군수공, 장령공, 통사랑공, 동덕랑공 5인 묘

24世 : 윤효영 (尹孝永) 장령공(掌令公 字 而顯, 初名 孝立)

장령공(掌令公) 효영(孝永)은 문천군수공파 쇠재댁, 양근대, 윗댁, 만주댁 채(采)자 항렬의 11대조(代祖)이다.

25世 : 윤이면

장남
쇄재댁을 이룸

25世 : 윤정면(尹廷冕)

차남
통사랑공
백부 윤효생(尹孝生)에 출계
이후 종가댁, 적성댁으로 분파

25世 : 윤상면

삼남
양근댁, 윗댁, 만주댁으로 분파

25世 : 지면

사남
이효증지평(以孝曾持平)으로 문중 효행록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효성이 지극 하여 지평으로 증직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손이 전북 김제시 백구면 월봉리, 반월리 등에 세거한다.


공(公)께서는 선조31년, 戊戌 1598년생으로 광해9년(1617년) 약관인 19세에 정사(丁巳)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24위로 합격하여 (선발인원 100명에 54명 합격) 진사에 올랐고 인조3년(1625년), 28세 나이에 을축(乙丑) 별시(別試) 병과 5위로(선발인원 100명)합격하여 문과에 급제 하였다.

인조9년(1631년)부터는 지평[지평: 조선시대 사헌부의 정5품으로 지평을 포함한 대관(臺官)은 사헌부의 기간요원이기 때문에 그 책무는 막중하였으므로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젊은 엘리트들이 임명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문과에 급제한 자로서 직배(直拜)하거나 승문원·성균관·홍문관 등을 거친 자들이 임명되었다.] 을 역임했고 인조11년(1633년)에는 암행어사로 강원도 일대에 파견 나가기도 했다.

이듬해인 인조12년(1634년) 1월 5일 장령[장령: 조선시대 사헌부의 정4품 관직으로 정원은 2인이다] 으로 제수 되었다.

己亥(1659년) 8월 13일 돌아가시니 향년 61세다.

문중의 구전에 의하면 북인파에 속했던 부친 윤양(尹讓)이 탄핵되자 인조반정 후, 후손들이 그 화를 우려해 묘비석을 철거해 매장 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높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으며 벼슬을 거부하기도 하고 지방으로 내려가기도 하였다 한다.

슬하에 이면, 정면, 상면, 지면 등 4남 1녀를 두어 차남인 정면은 형 효생(孝生)에 출계되고 지면은 이효증지평(以孝曾持平)으로 문중 효행록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효성이 지극하여 지평으로 증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손이 전북 김제시 백구면 월봉리, 반월리 등에 세거한다.

사위는 대사성, 대사간, 승지 등을 역임한 사천목씨 행선이다.

부인은 광주 이씨로 장인은 참찬을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된 이필영이다. [이필영: 조선후기 경기도관찰사, 예조참판,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공(公)의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진동면 동파리 종중 묘역으로 이장됐다.

종중묘 배치도

24世 : 장령공(掌令公) 윤효영(尹孝永)의 묘

대사성공, 군수공, 장령공, 통사랑공, 동덕랑공 5인 묘

대사성공, 군수공, 장령공, 통사랑공, 동덕랑공 5인 묘

25世 : 윤정면(尹廷冕) 통사랑공(通仕郞公)

장령공(掌令公) 윤효영(尹孝永)의 차남으로 백부 윤효생(尹孝生)에 출계하여 종가댁, 적성댁으로 분파

이후 계보

1

26世 : 윤천휴(尹天休) 동덕랑공

25世 : 윤정면(尹廷면)의 아들

2

27世 : 윤인증(尹仁曾)

26世 : 윤천창(尹天昌-양근댁) 남으로 양자 옴
종가댁과 적성댁으로 분파

종중묘 배치도

25世 : 통사랑공(通仕郞公) 윤정면(尹廷冕)의 묘

대사성공, 군수공, 장령공, 통사랑공, 동덕랑공 5인 묘

대사성공, 군수공, 장령공, 통사랑공, 동덕랑공 5인 묘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소재

26世 : 윤천휴(尹天休) 동덕랑공(通德郞公 字 翼承)


통덕랑공(通德郞公) 천휴(天休)는 종손댁, 적성댁의 채(采)자 항렬의 9대조(代祖)이다.

공(公)께서는 戊子1656년생으로 통덕랑(通德郞)[통덕랑: 통덕랑(通德郞)은 조선시대 품계 가운데 정5품 상계(上階)의 명칭이다. 조선시대 품계 제도는 정1품, 종1품, 정2품 순서로 종9품까지 18단계로 되어 있었고, 정1품부터 종6품까지는 상계, 하계로 구분하여 전체 30단계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5품 통덕랑 품계는 위에서 17번째 등급에 해당하며, 문과(文科) 과거시험에 급제하거나 문반(동반) 계열 관직에 임명되면 이 품계를 받을 수 있었다] 을 역임했다. 슬하에 1녀를 두시어 사촌의 아들(天昌의 子) 인증(人曾)을 입적했다.

1708년( 2월 21일)돌아가시니 향년 52세다.

부인은 전주 이씨로 통덕랑을 지낸 두한(斗漢)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호안군 환이며 증조는 령제군 석령이며 외조는 두직령 양천 허씨 린(嶙)이다.

사위는 참판을 지낸 해주 정씨 필영이다. 필영의 아들 정운유는 1735년(영조 11년) 생원시를 거쳐 1756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대사간·한성부우윤·도승지·대사헌을 지내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전주이씨 할머니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비단장수로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으며 선대 조상들의 초라한 묘지 석물(비석, 석등, 망부석, 상돌 등)을 새로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비용 모두를 부담하였다고 전해진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파주 진동면 동파리로 이장됐다.

종중묘 배치도

26世 : 동덕랑공(通德郞公) 윤천휴(尹天休)의 묘

대사성공, 군수공, 장령공, 통사랑공, 동덕랑공 5인 묘

대사성공, 군수공, 장령공, 통사랑공, 동덕랑공 5인 묘

우리종친회 6계파 - 1. 종손댁

1

27世 : 윤인증(尹仁曾 字 元卿)

인증(仁曾)은 종손댁과 적성댁 채(采)자 항렬의 8대조(代祖)이다. 우리종친회 6개 계파의 종손댁을 이어간다. 인증(仁曾)께서는 상면의 둘째아들 천창(天昌,26世)의 차남으로 큰아버지 천휴(天休)에 입적되었다. 1693년생으로 1742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50세이다. 첫째 부인은 은진 송씨로 부친은 송창조다. 1692년생으로 1727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35세다. 둘째 부인은 전주이씨로 부친은 규생(奎生)이다. 슬하에 2남(희담, 희함)을 두셨다. 장남 희담(喜聃)은 종손댁을 이어가고 차남 희함(尹喜咸)은 적성댁으로 분파되어 이어간다. 묘소는 문지리 연다동(烟茶洞,연대골)에서 1999년4월 24일 선영에 3位 합장 후 동파리 납골 묘역에 안치됐다.

2

28世 : 윤희담(尹喜聃 公著)

희담은 종손댁(경중)의 9대 할아버지이시다. 희담께서는 1712년생으로 1771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60세이다. 부인은 청송 심씨로 부친은 검정을 지낸 심세준이다. 1714년생으로 1765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51세이다. 자식이 없어 판도공파에서 형규를 입적후 2남(일규, 운규)을 낳아 일규는 판도공파 원석에 운규는 동생 희함(적성댁)에 양자로 출계됐다. 동파리 납골 묘역에 안치됐다.

3

29世 : 윤형규(尹亨逵 字 穉會 初名 相喆)

형규(亨逵)는 종손댁 경중의 8대 할아버지이시다. 판도공에서 입계하심, 판도공파의 泓(홍)의 子로 초명은 상철(相喆)이다. 辛未1751년생으로 甲戌1814년 12월 18일 돌아가시니 향년 64세다. 부인은 창원황씨로 부친은 近이다. 己巳1749년생으로 甲戌 1814년 12월 2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66세다.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4

30世 : 윤용(尹鏞 字 聖載)

용(鏞)은 종손댁 경중의 7대 할아버지이시다. 용(鏞)께서는 庚寅1770년생으로 丙辰1856년 4월 1일 돌아가시니 향년 87세다. 부인은 전주최씨로 부친은 섭(燮)이다. 丙戌1766년생으로 乙未1835년 돌아가시니 향년 70세이다. 묘소는 문지리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에 안치됐다.

5

31世 : 윤시행(尹始行 字 伯源)

시행(始行)께서는1792년생으로 甲午1834년 9월 2일 돌아가시니 향년 43세다. 부인은 남양 홍씨로 부친은 종화(種和)다. 1788년생으로 甲申1824년 9월 13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37세이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판도공파 인배(仁培)의 자 교일(敎一)을 입양했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6

32世 : 윤교일(敎一 字 德卿)

교일(敎一)은 종손댁 경중의 5대 할아버지이시다. 교일(敎一)께서는 판도공파 인배(仁培)의 子로 종손댁에 입적되었다. 1823년생으로 戌寅 1878년 4월 18일 돌아가시니 향년 56세이다. 묘소는 문지리 산양골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에 안치됐다. 부인은 광주 이씨로 부친은 일회(日會)이고 1879년 생으로 乙卯1939년 7월 1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1세이다. 묘소는 교하면 와동리의 子原이다.

7

33世 : 윤종호(尹宗鎬 字 聖殿)

종호(宗鎬)는 종손댁 경중의 고조 할아버지이시다. 종호(宗鎬)께서는 壬子 1912년 5월 12일 돌아가셨다. 묘소는 문지리 산양골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에 안치됐다. 부인은 전주 이씨로 부친은 수혁(守赫)이다. 庚戌1901년생으로 1981년 5월 14일 돌아가시니 향년 81세이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에 안치됐다.


34世 : 윤제홍(尹濟弘 字 圭元)

제홍(濟弘)은 종손댁 경중의 증조 할아버지이시다. 판도공에서 입계(?)

35世 : 윤희채(尹禧采)

윤제홍(尹濟弘)의 장남
아들 : 병두(炳斗), 병승(炳升), 병석(炳石)

35世 : 윤우채(尹祐采)

윤제홍(尹濟弘)의 차남
아들 : 병억(炳億), 병천(炳千), 병오(炳五)

35世 : 윤기채(尹祺采)

윤제홍(尹濟弘)의 3남
아들 : 병직(炳稷), OO

35世 : 윤도채(尹禱采)

윤제홍(尹濟弘)의 4남
6.25 전쟁 중 납북

35世 : 윤학채(尹鶴采)

윤제홍(尹濟弘)의 5남
쇠재댁 제은(濟殷)에 양자로 출계

35世 : 윤봉채(尹鳳采)

윤제홍(尹濟弘)의 6남
아들 : 병락(炳洛)

제홍(濟弘)은 종손댁 경중의 증조 할아버지이시다. 제홍(濟弘)께서는 己丑1889년 1월 18일 생으로 1972년 1월 15일 돌아가시니 향년 83세이다. 부인은 거창신씨로 丁亥 1887년 생이고 1917년 丁巳 4월 18일 돌아가시니 향년 30세이다. 後配는 청주 한씨로 甲午 1894년생이고 1969년 10월 5일 돌아가시니 향년 75세이다. 슬하에 6남 (희채, 우채, 기채, 도채, 학채, 봉채)을 두어 4남인 도채는 6.25동란시 납북되었고 5남인 학채는 쇠재댁 제은에 양자로 출계되었다. 묘소는 문지리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35世 : 윤희채(尹喜采 號 藥云)

희채(喜采)는 종손댁 경중의 할아버지이시다. 희채(喜采)께서는 己酉1909년 12월 26일생으로 명륜학원을 수료하고 김해 강서학원 수업후 휘문중학교 교원, 총무처 속기 국사편찬위원회 편수위원을 역임하고 유도회(儒道會) 총 본부 간사 등을 지냈다. 전국 백일장 12회 한시부문 차상으로 당선된바 있으며 한국서화 백년사에 등재된바 있으며 藥云시집을 남겼다. 壬子1972년 12월 11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4세이다. 부인은 선산김씨 永鑽의 장녀로 童順이다. 丁未1907년 2월 6일생으로 壬申1992년 4월 13일 돌아가시니 향년 86세다. 슬하에 3남(병두, 병승, 병석) 3녀(병순, 병남, 병주)를 두어 영천허씨 광무, 풍천임씨 홍순. 경주김씨 은기가 그 사위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에 안치됐다.

35世 : 윤희채(尹喜采)의 개인묘



35世 : 윤우채 (尹祐采 字 友容)

우채(祐采)는 종손댁 석중의 할아버지다. 우채(祐采)께서는 甲寅 1914년 10월 5일생으로 己未1979년 8월 6일 돌아가시니 향년 65세다. 부인은 진주유씨로 辛亥 1911년 3월 7일생으로 戊申 1968년 2월 26일 돌아가시니 향년 57세이다. 슬하에 병억(炳億), 병천(炳千), 병오(炳五) 3남 4녀를 두었다. 묘소는 문지리 월봉하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종중묘 배치도

종손댁 가족묘 - 27世윤인증(尹仁曾)부터

우리종친회 6개 계파 가족묘 전경

우리종친회 6개 계파 가족묘 전경

우리종친회 6계파 - 2. 적성댁

1

28世 : 윤희함(尹喜咸 字 君一)

희함(喜咸)은 적성댁 采字 항렬의 7대 할아버지이시다. 희함(喜咸)께서는 壬子1732년생으로 甲戌1814년 1월 2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3세다. 부인은 광주 李씨로 부친은 진사를 지내고 참판으로 증직한 복연(復淵)이다. 조부는 내원(來源)이고 증조부는 사정을 지낸 계만(啓晩)이다. 辛亥1731년생으로 庚午1810년 7월 19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0세이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형인 희담(喜聃)의 3남 운규(雲逵)를 입적했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2

29世 : 윤운규(尹雲逵 字 子禎 司馬公)

운규(雲逵)는 적성댁 采字 항렬의 6대 할아버지이시다. 공께서 희담(喜聃)의 셋째아들로서 숙부 희함(喜咸)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己丑1769년(영조45년)12월 28일생으로 순조10년(1810년) 경오 식년시 (진사) 3등 37위(67/100)로 합격하여 급제 하였다. 42세의 늦은 나이에 등과하여 훈련원(訓練院)의 종4품에 해당하는 司馬에 오르셨다. 사마직(司馬職)은 본래 軍師나 군수용품등을 관장했는데, 때로는 史官 일까지도 겸하기도 하여 문과에 급제 하고도 군대를 훈련시키는 부서의 관리(官吏)였다. 공께서는 문천군수공파 후손 뿐 아니라 통례공파 후손을 통틀어 조선조 최후의 과거 급제자이다. 庚子1840년 8월 4일 돌아가시니 향년 72세이다. 부인은 함평이씨로 부친은 유맹(儒孟)이고 조부는 贈교관(敎官)을 역임한 복운(復運)이다. 증조부는 진사를 지낸 수두(壽斗), 외조부는 안동장씨 집경(集慶)이다. 순조실록에 의하면 “순조 7년 3월 17일 예조에서 효자인 양주(楊州)의 선비 이복운(李復運)을 교관으로 증직(贈職)하고 급복(給復)하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양주가 후손의 세거지인 것으로 보인다. 戊子1768년 11월 4일생으로 丙申1836년 6월 28일 돌아가시니 향년 69세다. 묘소는 문지리 능안말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3

30世 : 윤수익(尹秀翼 字 景順)

수익(秀翼)은 적성댁 采字 항렬의 5대조이다. 수익(秀翼)께서는 순종 壬戌1802년 7월 25일 태어나시어 戊子1888년 12월 3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7세이다.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자 서울에서 포목점을 운영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돌아가신 후 문지리 선영으로 모시려 했으나 부자로 살면서 평소 종친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중 종원들의 반발에 부딪쳐 운구 중 장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축현리 덕수동에 묻히셨다 한다. 부인 밀양박씨는 박성진의 딸이며 음죽 현감을 지낸 박동최의 증손녀이다. 甲子1804년생으로 辛巳1881년 돌아가시니 향년 78세이다. 묘소는 적성 동면 백운리(적성면 객현리)에 모셔져 있었다. 두 분 모두 진동면 동파리 종중 묘역 납골당에 안치 됐다.

31世 : 윤좌영(尹佐榮 字 聖佑)

좌영(佐榮)은 적성댁 采字 항렬의 고조(高祖)이시다. 좌영(佐榮)께서는 乙酉1825년 5월 7일생으로 庚寅1890년 6월 19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7세이다. 부인은 청주 경씨로 부친은 도정을지낸 선(銑)이고 외조는 풍천 임씨 희욱이다. 甲申1804년생으로 1881년9월16일 돌아가시니 향년 56세이다. 좌영께서는 부친께서 운영하던 서울살림을 접고 적성면 궁평리로 이사오게 되었는데 당시 이삿짐을 나르던 마차가 수십 대에 달했다 한다.(객현리 경규 세씨 증언) 이후 장단군 대위면 나부리(현 비무장지대 내) 면 소재지 관창(官倉) 주변으로 이사하여 사시다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묘소가 장단면 북매계계상고교하에 있다.(長端北梅溪上古橋下繡織洞 庚原) 슬하에 2남을 두시어 장남이 교승(경채의 증조)이고 차남이 교덕(문채,명채의 증조)이다.통일 후 묘지의 이장은 적성댁 후손들의 과제다.

32世 : 윤교승(尹敎承)

윤좌영(尹佐榮)의 장남
아들 : 구호(龜鎬), 용호(龍鎬), 종선(宗善)

35世 : 윤교덕(尹敎悳)

윤좌영(尹佐榮)의 차남
아들 : 성호(성鎬), 동선(東善)


32世 : 윤교승(尹敎承 字 伯先)

교승(敎承)은 적성댁 경채의 증조(曾祖)이시다. 교승(敎承)께서는 壬子1852년생으로 학문이 높아 과거시험에 응시(광서원년, 1875년 4월 26일) 하였으나(경채 응시표 소장) 낙방하시었다. 구한말인 당시의 과거급제는 매관매직이 성행하던 시기로 실력이 있어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후 지역의 후대 교육을 위한 훈장으로 지내셨다. 己未1919년 12월 21일에 제자가 보내온 떡을 잡수시다 목에 걸려 돌아가시니 향년 68세다. 묘소는 적성 객현리에서 동파리 종중 묘역 납골당으로 안치됐다. 부인 전주이씨의 부친은 應儀이다. 己酉1849년생으로 甲午1894년 1월 3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46세이다. 묘소가 장단 수직동(비무장 북방지역) 선영에 있다. 슬하에 구호(龜鎬), 용호(龍鎬), 종선(宗善) 등 3남을 두어 구호(龜鎬)는 자식없이 돌아가시고 종선(宗善)은 판도공파로 출계됐다. 통일 후 묘지의 이장은 적성댁 후손들의 과제다.


32世 : 윤교덕 (尹敎德 字 重其)

교덕(敎德)은 적성댁 문채, 명채의 증조 (曾祖)이시다. 교덕(敎德)께서는 乙丑 1865년 8월 8일생으로 형 교승(敎承)과 함께 과거시험을 준비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壬辰1928년 10월 2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4세다. 증조께서는 학식과 문장에 능하고 문필이 수려하여 남기신 초서로 쓴 한시 병풍 (명채 소장)은 보기드믄 수려한 서체로 그 가치가 높다는 평이다. 세필로 쓴 가승(군수공계, 장령공계 포함)을 직접 써서 남기셨다. (명채 소장) 부인인 의령남씨는 용담현령을 지내신 남계훈의 따님으로 전라북도 진안군 정천면 모정리 망향의 동산에 용담 현령 남계훈의 선정을 기리기 위한 비(碑)가 있다.(고종 13, 1876년에 건립) 증조할머님께서는 현감의 따님답게 조신 하시고 학식 또한 높고 객현리 고개 넘어 살던 형님(교승 부인)과 우애가 돈독하여 주변의 칭송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丙寅1866년생으로 丙戌1946년 11월 2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1세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종중 묘역 납골당으로 안치됐다. 슬하에 2남(성호, 동선)과 1녀를 두었으며 함평이씨 범창(範昌)이 그 사위다.



33世 : 윤용호 (尹龍鎬 字 義圖)

용호(龍鎬)는 적성댁 경채의 할아버지이시다. 용호(龍鎬)께서는 壬午 1882년생으로 甲戌 1934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43세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부인은 풍산 심씨로 부친은 仁植이다. 癸未1883년 생으로 丁卯1927년 돌아가시니 향년 45세다. 슬하에 1남(제명)을 두었다. 묘소는 마전(麻田)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에 안치됐다.


33世 : 윤성호 (尹星鎬 字 福景)

성호(星鎬 )는 적성댁 문채의 할아버지이시다. 성호(星鎬 )께서는 壬辰1892년 생으로 癸酉1933년 9월 4일 돌아가시니 향년 43세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로 이장했다. 부인은 풍산심씨로 부친은 진사를 지낸 斗植이다. 癸巳1893년생으로 乙丑 1925년 8월 20일 돌아가시니 향년 32세이다. 묘소는 장단 장남면 백작리 구주현에 있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동생 동선(東善)의 장자인 제경을 입적했다. 통일후 묘지의 이장은 후손들의 과제다.


33世 : 윤성호 (尹星鎬)의 개인 묘



33世 : 윤동선 (尹東善 號 月峰)

동선(東善)은 적성댁 명채의 할아버지다. 할아버지께서는 1904년 9월 24일생으로 1975년 10월 24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1세다. 부인 밀양박씨(박옥순)의 부친은 훈병(勳秉)이다. 1904년 5월 23일생으로 1981년 2월 1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7세다. 할아버지께서는 장단군 대위면 나부리에서 태어나 당시 고랑포에 위치한 개성 보통학교를 졸업하셨다.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재학 중 월반을 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이후 문지리로 이사왔다. 할아버지의 큰댁 형님(구호, 용호)과 친형님(용호)들이 일찍 돌아가시자 조실부모한 조카 제명과 한집에 기거했는데 처음에는 문지리 군부대(포부대 취사장)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다. 1957년 문지리 산 10번지 임야를 소와 장려 쌀 등을 팔고 군용지 징발 보상금을 보태 매입하였다고 한다. 당시 매입한 임야가 4정7반(14,000여평)에 달하며 산하의 집터와 밭 1,000여평을 매입하는 등 터전을 마련 하셨다. 6.25전쟁 이전 조카인 제명을 장가보내고 일곱 마지기의 땅을 내주며 분가를 시키기도 하였다. 슬하에 제행, 제경, 제영, 제원, 제숙 등 5남매를 두었다. 장남인 제경은 형인 성호(星鎬)의 子로 출계 하였고 막내 제원은 무후였고 딸 제숙은 어려서 사망했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묘역으로 이장 됐다.

33世 : 윤동선 (尹東善)의 개인 묘

34世 : 윤제명 (尹濟命)의 개인 묘

—

종중묘 배치도

적성댁 가족묘 - 28世윤희함(尹喜咸)부터

우리종친회 6개 계파 가족묘 전경

우리종친회 6개 계파 가족묘 전경

우리종친회 6계파 - 3. 쇄재댁

1

25世 : 윤이면(尹이면)

24世:효영(孝永)의 장남으로 쇄재댁을 이룬다

2

26世 : 윤도겸(尹道謙, 字 仲益)

도겸(道謙)은 쇠재댁 석중(石重)의 10대 할아버지이시다. 도겸(道謙)께서는 己巳1601년생으로 庚戌1670년 2월 28일 돌아가시니 향년 70세다. 부인은 밀양박씨로 부친은 文相이며 庚申生이고 忌日은 2월 17일다. 슬하에 1녀만을 두어 숙부인 천창의 장자 덕증을 입양했다. 사위는 의령남씨 埈이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3

27世 : 윤덕증(尹德曾, 字 明卿)

양근댁에서 입계 덕증(德曾)은 쇠재댁 석중(石重)의 9대 할아버지이시다. 덕증(德曾)께서는 천창(天昌)의 장자로 큰댁 도겸(道謙)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辛酉1621년 생으로 辛未1691년 1월 7일 돌아가시니 향년 71세다. 부인 전주 최씨의 부친은 일유(日有)이다. 癸酉1633년생으로 癸丑1673년 8월 30일 돌아가시니 향년 41세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어 여흥민씨 후, 양천허씨 함이 그 사위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4

28世 : 윤희수(尹喜洙, 字 聖源)

희수(喜洙)는 쇠재댁 석중(石重)의 8대 할아버지이시다. 희수(喜洙)께서는 辛巳1641년생으로 甲寅1674년 돌아가시니 향년 33세다. 부인은 풍양조씨이며 부친은 첨지(忝知)를 지낸 세후이다. 戊寅1638생으로 丙子1696년 4월17일 돌아가시니 향년 59세다. 슬하에 종노, 택노 등 형제를 두셨는데 택노는 무후(無后)였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에 안치됐다.

5

29世 : 윤종노(尹宗老, 字 汝大)

종노(宗老)는 쇠재댁 석중(石重)의 7대 할아버지이시다. 종노(宗老)께서는 甲申1664년생으로 丁亥1707년 12월 23일 돌아가시니 향년 44세다. 부인은 연안 이씨로 부친은 동지를 지낸 泳이다. 癸卯生으로 甲申 2월 5일 돌아가시니 향년 42세다. 슬하에 1남(鐺)을 두었다.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6

30世 : 윤당(尹鏜, 字 幼聞)

당(鏜)은 쇠재댁 석중(石重)의 6대 할아버지이시다. 당(鏜)께서는 乙丑1685년생으로 丙辰1736년 10월 20일 돌아가시니 향년 52세다. 부인은 거창신씨로 부친은 생원을 지낸 後思이다. 辛酉 1861년생으로 己未 1919년 1월 21일 돌아가시니 향년 59세다. 슬하에 1남(경헌) 1녀를 두었으나 아들인 경헌이 후사없이 돌아가자 판도공파 昌燁의 子 시배(始培)를 입양했다. 전주이씨 숙달(叔達)이 그 사위다.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7

31世 : 윤시배(尹始培, 字 養之)

시배(始培)는 쇠재댁 석중(石重)의 5대 할아버지이시다. 시배(始培)는 판도공파 창엽의 子다. 甲申 1884년생으로 돌아가신 날은 미상이다. 부인은 전주이씨로 생몰 미상이나 일찍 돌아가셨다. 둘째 부인은 평양조씨로 생몰 미상이다. 후사 없이 돌아가셔 판도공파 德培의 子 명세(命世)를 입양했다.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8

32世 : 윤명세(尹命世 子 敬天)

명세(命世)는 쇠재댁 석중(石重)의 고조 할아버지다. 명세는 판도공파 덕배(德培)의 子다. 丁亥1887년생으로 丙午1906년 돌아가시니 향년 19세이다. 부인 교하노씨 부친은 光臣이다. 甲申 1884년생으로 을축 1925년 2월 3일 돌아가시니 향년 42세이다. 후사 없이 돌아가셔 윗댁 敎誠의 子 永鎬를 입양했다.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33世 : 윤영호(尹永鎬 字 仲明)

영호(永鎬)는 쇠재댁 석중(石重)의 증조 할아버지다. 영호(永鎬)는 윗댁 교성(敎誠))의 세째 아들이시며 명세(命世)께서 아들로 입양했다. 己未 1919년생으로 丁巳 1977년 2월 28일 돌아가시니 향년 59세이다. 부인은 청주 경씨로 부친은 勳이다. 庚申1920년 생으로 戊辰1988년 12월 28일 돌아가시니 향년 69세이다. 슬하에 3남(제덕濟德, 제헌濟憲, 제은濟殷)을 두었으나 둘째 제헌(濟憲)은 6.25전쟁시 납북되어 북한에 후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 묘역으로 안치됐다.

34世 : 윤제덕(尹濟德)

1남
아들 : 홍채(弘采)

34世 : 윤제헌(尹濟憲)

2남
6.25전쟁시 납북, 북에 후손이 있을 것으로 추정

34世 : 윤제은(尹濟殷)

3남
아들 : 학채(鶴采), 종손댁에서 입양, 제홍(濟弘)의 5남

34世 : 윤제덕(尹濟德)


이후 계보

1

35世 : 윤홍채(尹弘采)

2

36世 : 윤병운(炳雲)

3

37世 : 윤석중(尹石重)

아들:지환(智煥), 딸:아인(雅璘)

4

38世 : 윤지환(尹智煥)


34世 : 윤제은(尹濟殷)


이후 계보

1

35世 : 윤학채(尹鶴采)

종손댁에서 입양, 제홍(濟弘)의 5남

2

36世 : 윤병구(炳九)
36世 : 윤병화(炳華)

3

37世 : 윤OO(OO)



34世 : 윤제은(尹濟殷)의 개인 묘


—

종중묘 배치도

쇄재댁 가족묘 - 25世윤이면(尹이면)부터

우리종친회 6개 계파 가족묘 전경

우리종친회 6개 계파 가족묘 전경

우리종친회 6계파 - 4. 양근댁

1

25世 : 윤상면(尹상면)

1남 : 천성(天成)-아들 유증(裕曾)은 만주댁으로 양자감
2남 : 찬창(天昌)-3남을 둠, 1남 덕증(德曾)은 쇄재댁 도겸(道謙)에 양자감, 2남 인증(仁曾)은 종손댁 天休(천휴)에 양자감, 3남 휘증(휘증)
3남 : 천적(天迪)-아들이 없어 큰형님 천성(天成)의 아들을 양자 삼음, 만주댁을 이룸

2

26世 : 윤천창(尹天昌, 字 夏仲)

천창(天昌)은 양근댁, 윗댁의 重字 항렬의 11대 할아버지다. 공께서는 상면의 둘째아들로 음서직으로 벼슬길에 올라 통덕랑을 역임했다. 己亥1659년 3월 25일생으로 己酉1729년 8월 6일 돌아가시니 향년 71세다. 부인은 전주 이씨로 부친은 희년(禧年)이고 조부는 통사랑을 지낸 절(節)이고 증조는 한성판관을 지낸 항(恒)이고 외조부는 여산송씨 문후(文後)이다. 辛丑1661년 9월 28일생으로 己未1939년 6월 3일 돌아가시니 향년 79세다. 슬하에 3남 (덕증, 인증, 휘증) 2녀를 두어 덕증은 도겸(道謙)의 子로 출계되고 인증은 종손댁 천휴(天休)의 子로 출계되었다. 전주이씨 익희(益熙), 청주경씨 현(晛)이 사위다. 묘소는 교하 탄포 신오리(탄현면 만우리)에 있었으나 임야 3000여평이 타인에 매각됨으로써 발굴하여 화장했다.

3

27世 : 윤휘증(尹徽曾, 字 美卿)

휘증(徽曾)은 양근댁과 윗댁 重字 항렬의 10대 할아버지다. 공께서는 천창(天昌)의 셋째 아들이다. 음서직으로 벼슬길에 올라 통덕랑을 역임하셨다. 辛巳1701년 3월 15일생으로 庚申1740년 4월 26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41세다. 부인은 의령남씨로 부친은 현감을 지낸 철명(哲明)이고 조부는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지낸 성만(聖萬)이고 외조부는 평양조씨 석년(碩年)이다. 己卯1699년 6월 13일생으로 庚申1740년 10월 15일 돌아가시니 향년 42세다. 슬하에 2남(희일, 희양) 2녀를 두어 연안이씨 윤복, 전주이씨 희병이 그 사위다.

묘소는 문지리 선산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 됐다.

4

28世 : 윤희일(尹喜一, 字 汝咸)

희일(喜一)은 양근댁 은중의 9대조 이다. 희일(喜一)께서는 甲辰1724년생으로 癸亥1803년 4월 15일 돌아가시니 향년 80세다. 부인은 한양조씨로 부친은 몽상(夢相)이다. 己亥1719년생으로 癸亥1803년 5월 25일 돌아가시니 향년 85세이다. 문중족보와 대종회 발행 파평윤씨대관에 종부순절(從夫殉節)로 영조정려(英祖旌閭)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부군(夫君)을 이어 從夫했으며 열녀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동생 희양(喜陽)의 장자 홍규를 입양 했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5

29世 : 윤홍규(尹鴻逵 字 汝漸)

홍규(鴻逵)는 양근댁 은중의 8대조 할아버지다. 홍규(鴻逵)는 희양(喜陽) 즉, 작은아버지의 장자로 큰아버지인 희일(喜一)에 입양되었다. 乙丑1745년생으로 甲申1764년 10월 8일 돌아가시니 향년 80세다. 부인 진주강씨의 부친은 일흠(日欽)이다. 乙丑1745년생으로 甲寅1794년 7월 18일 돌아가시니 향년 50세이다. 슬하에 1남(鎤)을 두었다.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에 안치됐다.

6

30世 : 윤황(尹鎤 字 聲若)

황(鎤)은 양근댁 은중의 7대조 할아버지다. 황(鎤)께서는 丁酉1777년생으로 戊申1848년 9월 9일 돌아가시니 향년 72세다.부인 삭녕최씨의 부친은 배형(配衡)이다. 乙未1775년생으로 甲辰1844년 9월 5일 돌아가시니 향년 70세다. 슬하에 2남(시영, 시형) 3녀를 두어 차남인 시형은 출계되고 전주이씨 종민(鍾敏), 진주유씨 진형(鎭衡), 경주김씨 용제(用濟)가 그 사위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에 안치됐다.

7

31世 : 윤시영(尹始榮 字 雅善)

시영(始榮)은 양근댁 은중의 6대조이다. 시영(始榮)께서는 癸亥1803년생으로 戊辰1868년 2월 25일 돌아가시니 향년 66세다. 첫번째 부인인 전주이씨의 부친은 문봉(文鳳)이다. 辛酉1801년생으로 乙酉1825년 2월 12일 돌아가시니 향년 25세이다. 두번째 부인 우봉이씨의 부친은 익광(益光)이다. 己巳1809년생으로 丁未1847년 1월 30일 돌아가시니 향년 39세이다. 슬하에 3자매를 두어 풍산홍씨 정주(正周), 연안이씨 성구(星九), 연안이씨 병규(炳奎)가 그 사위다. 시영(始榮)의 묘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첫번째 부인의 묘소는 문지리 산양골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두번째 부인의 묘소는 문지리 군부대내에 존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 분 모두 후사없이 돌아가셔 출계한 시형의 子 교응(敎膺)을 양자로 입양했다.

32世 : 윤교응(尹敎膺 字 元七)

교응(敎膺)은 양근댁 은중의 5대 할아버지다. 교응(敎膺)께서는 판도공파로 출계한 시형의 아들로 큰아버지 시영(始榮)에 입적되었다. 壬辰1832년생으로 辛丑1901년 11월 1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70세이다. 부인은 진주유씨로 부친은 상유(翔裕)이다. 辛卯1831년생으로 戊辰1868년 2월 19일 돌아가시니 향년 38세이다. 슬하에 2남(태호, 승호) 4녀를 두었다. 양천허씨 윤(潤), 은진송씨 희길(熙吉), 양천허씨 혼(渾), 진주유씨 희춘(熙春)이 그 사위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33世 : 윤태호(尹泰鎬 字 魯瞻)

교응(敎膺) 1남, 태호(泰鎬)는 양근댁 은중의 고조 할아버지다. 태호(泰鎬)께서는 辛亥1911년생으로 庚寅1950년 10월 4일 돌아가시니 향년 40세이다. 부인은 연안이씨로 부친은 동녕(東寧)이다. 辛亥1911년생으로 壬午1942년 3월 2일 돌아가시니 향년 32세이다. 후사 없이 돌아가셔 동생 승호(昇鎬)의 둘째아들인 제봉(濟鳳) 을 입양했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 됐다.

33世 : 윤승호(尹昇鎬 字 守天)

교응(敎膺)의 2남, 승호(昇鎬)는 양근댁 철중의 고조 할아버지다. 승호(昇鎬)는 甲寅1914년생으로 己亥1959년 12월 29일 돌아가시니 향년 46세다. 부인은 선산김씨로 부친은 희용(羲容)이다. 癸丑1913년생으로 戊午1978년 돌아가시니 향년 66세이다. 슬하에 3남(제용, 제봉, 제학)을 두어 제용은 판도공파로 출계되고 제봉은 형인 태호(泰鎬)에 입양되었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에 안치됐다.

35世 : 윤연채(尹連采)의 개인 묘

34世 : 윤병찬(尹炳讚)의 개인 묘

—

종중묘 배치도

양근댁 가족묘 - 25世윤상면(尹상면)부터

우리종친회 6개 계파 가족묘 전경

우리종친회 6개 계파 가족묘 전경

우리종친회 6계파 - 5. 윗댁

1

28世 : 윤희양(尹喜陽, 字 道而)

희양(喜陽)은 윗댁 영중(英重)의 9대 할아버지다. 희양(喜陽)께서는 부친 휘증(徽曾)의 둘째 아들이다. 丁未1727년 윤 3월10일생으로 丁酉1777년 1월 20일 돌아가시니 향년 51세다. 부인 고성이씨로 부친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린(嶙)이고 조부는 참판으로 증직된 심(深)이고 증조는 좌승지로 증직한 진사 봉경(鳳慶)이다. 외조부는 참판으로 증직한 평양조씨 세명(世鳴)이다. 壬寅1722년생으로 己未1799년 11월 20일 돌아가시니 향년 78세이다. 슬하에 2남(홍규, 붕규)을 두어 장남인 홍규는 큰아버지 희일에 입양 되었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에 안치됐다.

2

29世 : 윤붕규(尹鵬逵 進士公, 字 雲擧)

붕규(鵬逵)는 윗댁 영중(英重)의 8대 할아버지다. 공께서는 부친 희양(喜陽)의 둘째 아들이다. 己巳1749년 7월 2일생으로 35세 나이로 正祖 7년(1783년) 癸卯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29위(59/100)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丙子1816년 12월 29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8세이다. 부인은 안동권씨로 부친은 及第한 시언(是彦)이며 조부는 생원 세령(世寧)이고 외조부는 검지를 지낸 남양홍씨 영경(咏庚)이다. 庚午1750년 1월 11일생으로 乙卯1795년 3월 2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46세다. 슬하에 1남(鍟)을 두었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3

30世 : 윤성(尹鍟 字 星仲)

성(鍟)은 윗댁 영중(英重)의 7대 할아버지다. 성(鍟)께서는 庚子1780년생으로 辛丑1841년 2월 2일 돌아가시니 향년 61세다. 부인은 庚子1780년생으로 乙酉1825년 11월 3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45세다. 부친은 나주정씨 의천(義天)이다. 슬하에 1남(시헌)을 두었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4

31世 : 윤시헌(尹始憲 字 文甫)

시헌(始憲)은 윗댁 영중(英重)의 6대 할아버지다. 시헌(始憲)께서는 癸酉1813년에 태어나 庚申1860년 7월 19일 돌아가시니 향년 47세다. 부인은 1810년생으로 甲子1864년 3월 9일 돌아가시니 향년 54세이다. 부친은 수원백씨 동영(東英)이다. 슬하에 1남(교성) 1녀를 두어 연안이씨 태구(台九)가 그 사위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5

32世 : 윤교성(尹敎誠 字 元三)

교성(敎誠)은 윗댁 영중(英重)의 5대 할아버지다. 교성(敎誠)께서는 壬辰1832년생으로 己亥1899년3월3일 돌아가시니 향년 67세다. 부인은 壬辰1832년생으로 乙丑1865년 7월 9일 돌아가시니 향년 33세이다. 부친은 안산김씨 孝源이다. 슬하에 3남(정호, 익호, 영호)를 두시어 차남 익호(益鎬)는 판도공파로 출계되고 삼남 영호(永鎬)는 쇠재댁 명세(命世)의 자로 입양되었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6

33世 : 윤정호 (尹鼎鎬 字 景九)

정호(鼎鎬)는 윗댁 영중(英重)의 고조 할아버지다. 정호(鼎鎬)께서는 甲寅1854년생으로 壬午1882년 12월 7일 돌아가시니 향년 29세다. 부인은 乙卯1855년생으로 1917년 12월 2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3세다. 부친은 반남박씨 덕수(德壽)이다. 슬하에 1남(제익)을 두었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34世 : 윤제익 (濟益 字 汝兼)

제익(濟益)은 윗댁 영중(英重)의 증조이시다. 제익(濟益)께서는 辛巳1881년 12월 10일생으로 乙未1955년 11월 25일 돌아가시니 향년 75세다. 부인은 은진송씨로 戊寅1878년 9원 1일생으로 甲午1954년 11월 3일 돌아가시니 향년 77세다. 슬하에 2남(형채, 이채)을 두었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35世 : 윤형채(尹亨采)

슬하에 5남(병학,병완,병덕,병태,병각) 1녀(병숙)을 두었다. 장남 병학은 6.25전쟁중 납북되었으며 이후 개성근방에 기거한다는 소식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북에 후손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납골묘에는 가묘로 구성되어 있다. 공(公)은 종중묘원에 개인묘로 안치되어 있다.

35世 : 윤이채(尹利采)

슬하에 1남(병철) 2녀(병희,병정) 아들 병철은 캐나다로 이민을 갔으며 손자인 세중은 캐다에서 학업을 마치고 국내로 들어와 숙명여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공(公)은 종중묘원에 개인묘로 안치되어 있다.

35世 : 윤형채(尹亨采)의 개인 묘

35世 : 윤이채(尹利采)의 개인 묘

35世 : 윤형채(尹亨采) 계보


35世 : 윤이채(尹利采) 계보

종중묘 배치도

윗댁 가족묘 - 28世윤희양(尹喜陽)부터

우리종친회 6개 계파 가족묘 전경

우리종친회 6개 계파 가족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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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世 : 윤병덕(尹炳德)의 개인 묘

36世 : 윤병태(尹炳泰)의 개인 가묘

36世 : 윤병각(尹炳珏)의 개인 묘

종중묘 전경

우리종친회 6계파 - 6. 만주댁

1

26世 : 윤천적 (尹天迪, 通德郞公 字 啓淑)

천적(天迪)은 만주댁 용채(龍采)의 9대 할아버지다. 공께서는 상면의 5남 3녀중 막내아들이다. 丁未1667년생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내셨다. 丁未1727년 돌아가시니 향년 61세다. 첫째부인은 전주이씨로 부친은 수준(壽俊)이고 둘째부인은 진사를 지낸 전주이씨 행전(行全)의 따님이다. 甲寅 1674생으로 丙辰 1736년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이다. 슬하에 2녀만을 두어 출계한 큰형 天成의 子 유증을 입양했다. 풍천임씨 집(集)과 순천김씨 극명(克明)이 그 사위다. 묘소는 문지리 가족묘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통덕랑: 통덕랑(通德郞)은 조선시대 품계 가운데 정5품 상계(上階)의 명칭이다. 조선시대 품계 제도는 정1품, 종1품, 정2품 순서로 종9품까지 18단계로 되어 있었고, 정1품부터 종6품까지는 상계, 하계로 구분하여 전체 30단계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5품 통덕랑 품계는 위에서 17번째 등급에 해당하며, 문과(文科) 과거시험에 급제하거나 문반(동반) 계열 관직에 임명되면 이 품계를 받을 수 있었다]

2

27世 : 윤유증 (尹裕曾, 字 子貽)

유증(裕曾)은 만주댁 용채(龍采)의 8대 할아버지다. 유증(裕曾)께서는 출계한 천성(天成)의 子로 작은아버지에 입양되었다. 甲子1684년생으로 庚午1750년 돌아가시니 향년 67세이다. 부인 전주이씨의 부친은 성재(聖栽)이다. 甲寅1674년생으로 壬戌1742년 돌아가시니 향년 69세이다. 슬하에 희좌(喜佐), 희상(喜商)등 2남을 두었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3

28世 : 윤희상(尹喜商, 字 伯殷)

희상(喜商)은 만주댁 용채(龍采)의 7대 할아버지다. 희상(喜商)께서는 부친 유증(裕曾)의 둘째 아들이다. 乙卯1735년생으로 乙亥1815년 돌아가시니 향년 81세이다. 부인 거창신씨의 부친은 後復이다. 생몰일시는 미상이다. 슬하에 2남(우규, 익규)을 두어 장남인 우규는 무후였다. 묘소는 문지리 가족묘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에 안치됐다.

4

29世 : 윤익규(尹翼逵 字 聖甫)

익규(翼逵)는 만주댁 용채(龍采)의 6대 할아버지다. 익규(翼逵)께서는 己卯 1759년생으로 乙亥 1815년 5월 23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7세이다. 부인은 안동권씨로 부친은 及第 시언(是彦)이며 조부는 생원 세령(世寧)이고 외조부는 검지를 지낸 남양홍씨 영경(咏庚)이다. 庚午1750년 1월 11일생으로 乙卯1795년 3월 2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46세다. 슬하에 1남(銑)을 두었다. 묘소는 문지리 선영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5

30世 : 윤선(尹銑 字 玉汝)

선(銑)은 만주댁 용채(龍采)의 5대 할아버지다. 선(銑)께서는 丙戌1766년생으로 戊戌1838년 8월 18일 돌아가시니 향년 59세다. 부인은 己丑1769년생으로 庚寅1830년 12월 26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2세다. 부친은 진주류씨 지종이다. 슬하에 4녀만을 두어 판도공파 만기(萬基)의 子 두영을 입양했다. 언양김씨 두석(斗錫), 청송심씨 원규(遠奎), 창녕성씨 재규(載珪), 진주류씨 용수(龍秀)가 그 사위다. 묘소는 문지리 가족묘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했다.

6

31世 : 윤두영(尹斗榮 字 致建)

두영(斗榮)은 만주댁 용채(龍采)의 고조 할아버지다. 두영(斗榮)은 판도공파 만기(萬基)의 子로 입양되었다. 乙卯1795년생으로 乙卯1855년 10월 20일 돌아가시니 향년 61세이다. 부인은 丁巳1797년생으로 辛酉1861년 9월 27일 돌아가시니 향년 65세이다. 부친은 전주이씨 우룡(祐龍)이다. 슬하에 2남(교설, 교직) 1녀를 두어 교직(敎稷)은 후손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며 순흥안씨 병혁(炳赫)이 그 사위다. 묘소는 문지리 가족묘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7

32世 : 윤교설(尹敎卨 字 舜明)

교설(敎卨)은 만주댁 용채(龍采)의 증조 할아버지다. 교설(敎卨)께서는 己卯1879년생으로 己酉1909년 4월 25일 돌아가시니 향년 31세다. 부인은 辛巳1881년생으로 丁亥1947년 1월 27일 돌아가시니 향년 66세이다. 부인의 부친은 강릉김씨 진정(振政)이다. 슬하에 1남(석호) 1녀를 두어 평산신씨 명균(明均)이 그 사위다. 묘소는 문지리 가족묘에서 동파리 납골묘역으로 안치됐다.

33世 : 윤석호 (尹石鎬)

석호 (尹石鎬)는 만주댁 용채(龍采)의 할아버지다. 슬하에 제창(濟昌), 제남(濟男), 제선(濟先)을 두었다.

34世 : 윤제창(尹濟昌)

1남

34世 : 윤제남(尹濟男)

2남

34世 : 윤제선(尹濟先)

3남



34世 : 윤제창(尹濟昌) 계보


34世 : 윤제남(尹濟男) 계보


34世 : 윤제선(尹濟先) 계보



종중묘 배치도

만주댁 가족묘 - 26世윤천적(尹天迪)부터

우리종친회 6개 계파 가족묘 전경

우리종친회 6개 계파 가족묘 전경

우리종친회 6개 계보의 유래

문천군수공파(文川郡守公派) 자손인 우리 모두는 23世 윤양(尹讓)까지 같은 할아버지시다.

대사성공(大司成公) 양(讓)께서는 기해연시 문과에 급제하시어 삼사관,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오르셨다. 공(公)께서는 두 아드님을 두시어 첫째는 효생(孝生-군수공), 둘째는 효영(孝永-장령공)이시다. 효생(孝生-군수공)의 자손은 지금의 종손댁과 적성댁이며 효영(孝永-장령공)의 자손은 쇠재댁, 양근댁, 윗댁(일명 한산댁), 만주댁으로 나뉜다.

흔히 택호는 남자의 벼슬에 따라 군수공댁, 장령공댁, 진사댁, 참봉댁, 면장댁 등 그 직함을 따서 불려진 연유로 양반집에서만 쓰였다.

근 현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 가문엔 벼슬 길에 오르신 분이 안계셨다.

따라서 우리 문중의 각 택호는 각 집안의 할머니의 본향이나 출신 고향을 따서 호칭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종손댁

종손 집안의 호칭은 당연히 종손댁이 되었고 일명 기새울댁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경중의 5대조 교일(敎一)과 증조 제홍(濟弘)께서 기새울 (교하 와동동) 판도공파 집안에서 양자로 입적되며 붙여진 이름이다.

적성댁

적성댁은 명채의 6대조 수익(秀翼)께서 서울에 거주하시다 돌아가시고 아들이신 좌영(佐榮)께서 적성 객현리의 청주경씨에 장가들어 연천 궁평리를 거쳐 장단군 대위면 나부리와 적성 객현리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그런 연유로 명채의 할아버지인 동선(東善)께서도 당시 적성 남면의 밀양박씨와 결혼후 문지리로 이사 오시면서 얻게 된 이름이다.

쇄재댁

쇠재댁은 석중(石重)의 증조부 제덕(濟德)의 부인이신 기계유씨가 쇄재(지금의 금촌 금릉동)에서 시집온 연유로 불리게 되었다.

양근댁

양근댁은 은중의 고조부 태호(泰鎬)의 부인이신 연안이씨가 양근에서(지금의 양평 양근리로 추정)시집온 연유로 불리게 되었으며 양근리 주변에 파평윤씨의 판도공파 성안공계의 집안이 세거하고 있어 혼사의 인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윗댁

윗댁은 영중(英重)의 집안 택호로 종중산 산하인 문지리 맨 위에 위치하여 불려진 이름으로 보이며 이후 종중산이 개인 명의로 이전되자 6.25 이후 금승리(한산리)에 집을 짓고 이사하며 일명 한산댁이란 호칭을 얻게 된 것이다.

만주댁

만주댁의 경우는 용채(龍采)의 조부 석호(石鎬)께서 일제 치하를 피해 만주로 이주하여 그 곳에 거주하며 만석꾼이 되었고 문지리 집안 중의 몇몇은 일제의 징병을 피해 만주로 가서 일을 돕기도 했다. 해방 후 다시 문지리로 이사 오면서 얻게 된 호칭이다.

선대 조상의 지위(품계) 복원 과제

선대 조상의 지위(품계) 복원

입계(入系)와 출계(出系) 의미, 양자(養子) 관행

계보도에는 입계(入系)와 출계(出系)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입계는 다른 파에서 해당 파로 양자로 들어오는 것을, 출계는 해당 파에서 다른 파로 양자를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조선시대 종법(宗法) 제도 하에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중요한 관행이었습니다.

문천군수공파 입양자 현황

문천군수공파 문지리 종산의 내력

1. 종산(宗山)의 의미

종산(宗山)의 형성과 그 규모의 확대는 종중과 같은 친족집단의 형성과 관련이 있다.

고려 말부터 시행된 종법제도 (宗法制度)에 의해 제사가 행해지고 그 봉사(奉祀)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공동 조상의 자손들이 종손을 중심으로 종중 혹은 문중이라는 공동 집단을 구성하게 되었고 이들이 공동 출연하여 종중산으로 불이는 선산(先山)을 마련하거나 국가에 공을 세운 왕족과 관리에게 임금이 하사하는 사패전, 사전 등은 수조권(收租權)으로서 지급되는 토지였으며 사양산(私養山)의 경우는 임산물의 채취의 목적으로 지급되어 당초 1~3대까지 세습을 허용 하였으나 권문세가의 영구세습화 되기에 이르렀다. 그 권한의 인정은 영․정조때 더욱 확대 되었으며 연산군 이후 권문세가에 사패지가 남발되기도 했다.

2. 문지리 宗山의 형성 과정

문천군수공(文川郡守公) 윤염(尹磏,19世)께서는 한산군수를 역임 후 돌아가셔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 통례공(通禮公) 사하(師夏,18世)의 묘하(선산자강핵원)에 묻히시고 직장공(直長公), 좌승지 봉종(奉宗,20世)께서는 중종시(1538년)에 돌아가시여어 문지리 능안말에 부인 안동김씨와 쌍분으로 모셔졌다.

이후 누대를 거듭하며 문지리 전역의 산하에 묘소를 쓰며 명실상부한 宗山이 되었다. 임금이 하사한 사패지(賜牌紙)를 확인 할 수는 없으나 우리 문중에 전해지는 구전(口傳)에 의하면 봉종(奉宗,20世)께서 상의원 직장으로 임금의 측근에서 봉직 (奉職)했던 공로로 하사 받은 사패지(賜牌地)였다고 한다.

이후 제용감정, 이조참판을 지낸 윤길(21世), 대사헌을 지낸 윤수민 (22世), 대사성을 지낸 영평군 윤양(23世), 현감․군수를 지낸 윤효생 (24世), 대사헌의 장령을 지낸 윤효영(24世)등 5代에 걸친 연이은 과거 급제로 관계와 학계에 진출 하며 명성을 얻게 되었고 우리 윤문의 사거지 이자 세거지가 되었다.

3. 종산(宗山)의 규모 및 유실(遺失) 위기

임금(中宗)으로부터 하사받은 종산은 36정보(11만평) 규모로 문지곡 전역과 축현리 안산(案山) 일부에 해당했다.

동파리 이장 전 조상묘역의 분포를 보면 문지리 웃 말과 능안말, 잣자락, 산양골, 연대골, 축현리 안산 등 문지리 전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1909년 한일 합방 이후 토지의 세부측량을 통해 조세부과를 하게됨으로써 부득이 36정보 중 선대 묘소가 있던 문지리 능안 말과 웃 말의 일부 16정보 만을 측량 등록하게 되었고 당시 종가댁 故제홍, 쇠재댁 故제은, 윗댁의 故제익 등 3인 명의로 공동 등기하게 되었다. 이후 종손인 故제홍의 개인 사정으로 16정보에 해당하는 종산 모두를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광산김씨에 매각되어 종산 모두를 잃게 되었다.

4. 일부 종산(宗山)의 회복 과정

선대 조상을 모신 종산이 우리 윤문이 아닌 남에게 넘어가게 됨을 안타깝게 여긴 종원들을 대신해 적성댁 동선(東善,33世), 쇄재댁 제은(濟殷,34世) 등이 나서 당시 일제 강점기를 피해 만주로 가서 큰 돈을 벌어온 만주댁 故석호를 설득하고 광산김씨(故용제)에 되팔것을 누차에 걸쳐 설득한 끝에 참봉공 이면(25세)의 묘소가 있던 능안말 끝 일부를 제외한 선대묘소가 있던 종산 모두를 만주댁 석호(石鎬,33世)께서 매입함으로써 되찾게 되었다.

수년 후 지금의 부대 주둔지 뒷산을 분할하여 故정봉택씨에 매도하고 도림개 옆산은 쇠재댁 故제은에 매도하게 되었고 대사헌공 수민(22世)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대묘소가 분포해 있던 웃말 산 4정 7반(15,000여평)은 적성댁 故동선께서 매입함으로써 종산의 명목을 유지해 왔다.

6.25.동란 이후 만주댁이 서울에서의 사업투자를 이유로 보유 임야를 매각 하기에 이르자 종원들의 논의 끝에 당시 임야가격보다 저렴하게 종중에서 공동 매입키로 하고 십시일반으로 거출키로 하였다.

수년전 故제경씨가 보낸 내용증명과 故병억씨의 증언에 의하면 각 집안별 종산 매입을 위한 거출 내역은 다음과 같다.


[종산(宗山) 환매를 위한 거출 내역]

5. 우리에게 주는 교훈

6.25. 동란이후 여러 해 가뭄 등 기근으로 모두 어려움에도 종산(宗山) 유지를 위해 의기투합하여 십시일반 거출한 것은 문천군수공파(文川郡守公派) 후손 모두에게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타인에 넘어간 종산을 되찾을 수 있도록 사재를 털어 환매했던 만주댁 석호(石鎬,33世) 그리고 환매 과정의 중재에 나서고 선대 묘역이 있던 임야를 매입했던 적성댁 동선(東善,33世)과 쇠재댁 제은(濟殷,34世)의 역할은 우리 모두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이후 만주댁에서 보유 임야를 매각 하기에 이르자 당시 임야 가격보다 저렴하게 종친회에 양도 결정을 하신 석호(石鎬), 그 결정에 따라 매입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매입자금을 거출한 각 계보의 어른들 [우채(祐采), 동선(東善), 제덕(濟德), 제은(濟殷), 제봉(濟鳳), 형채(亨采), 이채(利采)] 께서 계셨기에 현재의 우리 문천군수공파 문지리종친회가 유지 발전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에 종산(宗山)의 형성과정과 그간의 변천과정을 정리 기록함으로써 선대에 감사한 마음을 기리고 후대에 남기고자 한다.

문지리(文智里)의 지명 유래

파주시 탄현면 문지리는 1510년 조선 중종시 상의원 직장(尙衣院 直長),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한 윤봉종(尹奉宗)이 문지동 일대의 사패지 36정(11만평)을 하사 받으며 파평 윤문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이후 누대를 거듭하며 그 자손들이 제용감정, 이조참판을 지낸 윤길(尹吉), 대사헌 윤수민(尹壽民),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영평군(領平君) 윤양(尹讓), 현감 군수 윤효생(尹孝生), 대사헌(大司憲) 장령(掌令) 윤효영((尹孝永) 등이 관계와 학계에 진출하며 명성을 얻게 되었다.

문지동의 지명은 이들 명문가들이 입향 하며 얻게 된 이름으로 당초 불려진 文知의 어원은 글文자와 알知자로 글을 안다는 뜻이고 문줄이라는 자연부락명도 “글줄이나 아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가운데 동네인 능안말은 당상관 이상의 높은 벼슬을 한 분들의 묘소가 있어 능안이라 불렸으며 마을 뒷동산 정상은 이들 벼슬아치들의 머리위에 있다 하여 관모봉, 갓뫼산이라 불리고 있다.

임진강 나룻터에 연하는 고개를 도림개로 불리고 있고 일제 강점기 이전 강 중간에 일미도(一眉島)라 불리는 섬 이 있어 지금도 그 벌판에 갈 때는 “섬에 간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당초의 지명인 文知(알지)洞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文智(지혜지)里로 표기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문지리 지명유래에 대한 소회

광무3년(1899년) 교하군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지금의 탄현면은 현내면, 신오리면, 탄포면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파주군으로 병합되면서 탄포의 탄자와 현내면의 현자를 따서 탄현면이라 칭하게 되었다.

1899년 이전 탄포면의 행정리는 축현리 오금리 금승리 등 3개리만을 두고 있어 문지동(文知洞)은 자연마을명으로 문지동, 문줄로 불려졌다.

文知의 어원은 ‘글文’자와 ‘알知’자로 글을 안다는 뜻으로 문줄은 “글줄이나 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문지동에는 글줄이나 아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우리 선대조들께서 벼슬 후 낙향하여 세거지를 이룸으로써 얻게 된 지명인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文知里는 文智里로 표기하고 있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90년 이후 파주군 문화원에서는 군내 모든 마을의 지명유래를 정리한 바 있다.

당시 문화원 사무장 이었던 이기현씨는 파주지역을 전수조사하면서 수집된 자료라며 문지리의 지명유래를 쇠파리의 황희정승 예장 시 문상차 그곳 어봉을 내방한 문종의 교시로 문학과 지혜를 넓히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라 주장했다.

당시 나는 그분(오래전 작고)을 찾아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내가 아는 문지리는 글줄이나 아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어려서 할아버님한테 전해 들었고 옛 파평윤씨문천공파 족보와 우리집안에 전해오는 가승보에도 文知洞으로 표기되어 있었던 점을 들었다. 친구 아버님이었던 그분은 “자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릴 해”라며 내 주장을 일축 했다.

그 후 파주군 지명 유래집은 발간되어 배포되었다.

최근 파주문화원에 바로 잡을 것을 제기한바 있으나 근거가 미약하고 모든 공부의 수정 등 혼란만 가중 할 수 있다며 어렵다는 회신을 받은바 있다.

그렇다면 文知里에서 文智里로 바뀐 이유는 뭘까?

이의 확인을 위해 일제강점기의 파주군의 행정연혁변경사항을 찾아보려 했으나 문헌을 찾지는 못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에 글줄이나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마을 이름이 “건방지다”며 文智里로 바꿨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기 개명된 마을의 대표적으로 사례로 금촌(쇠말, 새말), 문산(汶山, 흙탕물이 산을 이룬다는 뜻)이 있다. 이후 문산은 이미지가 안 좋다는 이유로 文山으로 개명되었다. 이제 와서 지명을 고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우리 윤씨 문중으로 인해 얻어진 지명이라는 것을 알고 자긍심을 갖고 후대에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35世 적성댁 명채)

그 시절 파주에서 무슨 일이...

18世 : 윤사하(尹師夏 通禮公 學甫) (1436년~1483년)

성종 11년 (1480.01.24)
교하의 노비가 양인을 살해하다.

성종 15년 (1484.08.19)
파주출신 서녀를 놓고 재상끼리 첩 싸움을 하다.(첩 싸움을 한 재상의 벼슬을 빼앗다. 한 재상은 외방에 부처하게 하다.)

성종 24년 (1493.10.29)
농사가 잘 되지 못한 교하의 공신전, 별사전, 직전, 사전의 세금을 감면하다.

성종 25년 (1494.06.19)
핑계를 대고 능 제사에 불참한 파주목사 김지동을 파출(罷黜)하여 사헌부로 하여금 추국 하도록 지시

19世 : 윤염(尹磏, 文川郡守公, 通訓大夫) ( ? ~ 1515년)

연산군 05년 (1499.08.19)
파주지역에 밤톨만한 우박으로 벼 등이 손상 되다.(강무 중단을 청하다)

연산군 09년 (1503.08.23)
파주지역에 지진이 일어나다.

연산군 10년 (1504년)
갑자사화 (폐비윤씨의 복원에 반대한 인물 처형)

연산군 11년 (1505.07.01)
파주의 금표 안에 들어가는 자를 죽여 길가에 버리다.

20世 : 윤봉종(尹奉宗, 直長公, 通政大夫, 字 子重) (1489년~1538년)

중종 04년 (1509.04.12)
전 파주목사 어윤철이 죽자 파주 백성들이 그 은혜를 사모하여 영구 앞에서 제사지내다.

중종 04년 (1509.10.05)
파주지역의 도적을 잡으라고 명하다.

중종 10년 (1515.10.01)
파주지역에 지진이 일어나다.
여진이 발생하다.(10.11)

중종 14년 (1519)
기묘사화(남곤 등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 등이 숙청되다.

중종 16년 (1521.03.15)
파주지역에 우박이 내리다.

중종 16년 (1521.08.04)
파주지역에 지진이 일어나다.

중종 19년 (1524.05.13)
파주지역이 충해를 입다.

중종 27년 (1532.04.03)
파주지역에 서리가 내리다.

중종 29년 (1534.08.01)
임금이 파주를 지나는 길에 윤은로의 묘에 치제 하도록 전교하다.

중종 30년 (1535.09.19)
임금이 파주에 이르러 노인과 효자에 음식을 내리다.

중종30년 (1541.11.18)
파주지역에 눈이 내리고 우레가 치다.

21世 : 윤길(尹吉, 監正公, 嘉善大夫, 字 德一) (1522년~1578년)

명종 01년 (1546.05.05)
파주지역에 지진이 일어나다.

명종 02년 (1547.06.07)
치민과 구황을 잘못한 파주목사 안위를 파직하다.

명종 03년 (1548.03.28)
파주지역에 우박이 내리다.

명종 11년 (1556.08. 12)
파주지역에 우박이 내리다.

명종20년 (1565.04.19)
지진이 일어나 기와가 흔들리다.

명종22년 (1567.04.12)
비가 오지 않아 우물이 바짝 마르다.

22世 : 윤수민(尹壽民, 大司憲公, 嘉善大夫 字 仁叟) (1555년~1619년)

선조 04년 (1571.07.01)
백인걸이 벼슬을 그만 두고 파주로 돌아가다.

선조 07년 (1574.04.01)
율곡 이이가 6개월간 벼슬하고 파주로 낙향하다.

선조 08년 (1575.10.25)
이이가 파주에서 학문과 성혼의 등용을 아뢰다.

선조 16년 (1583.06.01)
이이가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선조 20년 (1587.09.01)
파주에 머물렀던 청양군 심의겸이 죽다.

선조 22년 (1589.10.01)
정여립이 문하에 드나들었다는 이유로 성혼이 해직되다.

선조 25년 (1592.04.01)
왜군이 파주와 양주를 왕래하다.(임진왜란 발발)

선조 25년 (1592.09.21)
파주 등의 의병을 심대의 통제를 받게 하다.

선조 26년 (1593.01.01)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파주에 진군하여 벽제역 에서 싸우다가 불리해지자 개성으로 후퇴하다.

선조 26년 (1593.02.06)
명군이 벽제에서 패하여 파주로 퇴진하다.

선조 26년 (1593.02.10)
명군이 혜음령에서 패하여 동파로 퇴진하다.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활약

선조29년 (1596.11.26)
권율이 파주산성을 군사요충지라고 말하다.

선조30년 (1597년~1598년)
정유재란 발발

23世 : 윤 양(尹 讓, 大司成公, 領平君) (1573년~1611년)

선조 33년 (1600.10.17)
교하현 저현을 보토하는데 9000명이 소요되다.

선조 35년 (1602.02.15)
사헌부가 전란의 소식을 듣고도 나오지 않은 성혼의 처벌을 청하다.

선조 38년 (1605.07.24)
파주에 풍수해를 입다.

광해 즉위년 (1608.04.08)
관학 유생 이목,광주목사 신응구 전 서부참봉 배흥중, 등이 성혼의 원통함을 풀어 달라고 상소하다.

광해군04년 (1612.11.15)
이의신의 교하 천도에 대한 예조에서 회계하다.

24世 효생(孝生, 郡守公, 字 而達陰) (1589년~1648년)
24世 효영(孝永, 掌令公, 字 而顯, 初名 孝立) (1598년~1659년)

광해군 10년 (1618.06.16)
경기․강원 군사에게 파주산성을 지키게 하다.

광해군 10년 (1618.07.09)
비변사에서 파주․임진을 지킬만한 계책을 논의하다.

인조 01년 (1623.03.25)
성혼이 관작을 회복하다.

인조 05년 (1627.07.14일)
파주지역에 비바람으로 곡식이 모두 쓰러지다.

인조 05년 (1627.07.17)
파주의 장군 이순온, 안신도 등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도망칠 것을 맨 먼저 주창하다. 안신도를 잡았으나 단단히 가두지 않아 온 가족이 도망하다

인조 14년 (1640.03.27)
장단의 한 면을 파주에 예속시키다.

26世 도겸(道謙, 字 仲益) (1601년~1670년)
27世 덕증(德曾, 字 明卿) (1621년~1691년)
28世 희수(喜洙, 字 聖源) (1641년~1674년)

인조 22년 (1644년.01.08)
세자가 장릉을 전알하다.

인조 25년 (1647.05.23)
파주지역에 서리가 내리다.

인조 25년 (1647.12.21)
형벌을 남용한 파주목사 윤형각을 파직하다.

효종 04년 (1653.02.20)
파주에 전염병이 돌자 제를 올리고 약물을 보내다.

현종 01년 (1660.02.29)
국상중에 술과 고기를 먹은 파주목사를 파직하다.

현종 06년 (1665.04.23)
파주지역에 밤톨만한 우박이 내려 보리, 밀, 목화가 손상을 입다.

현종 10년 (1669.05.11)
파주지역에 비들기 알만한 크기의 우박이 내리다.

숙종 06년 (1680.09.21)
대신들이 파주에 와있는 청 사신을 청대하다.

26世 천휴(天休, 通德郞公,字 翼承) (1656년~1708년)
26世 천창(天昌, 字 夏仲) (1659년~1729년)
29世 종노(宗老, 字 汝大) (1664년~1707년)
26世 천적(天迪, 通德郞公 字 啓淑) (1667년~1727년)
27世 유증(裕曾, 字 子貽) (1684년~1750년)
30世 당(鏜, 字 幼聞) (1685년~1736년)

숙종 19년 (1693.08.28)
임금이 파주행궁에 머물 때 행사 진행을 잘못하여 목사가 곤장을 맞다.

숙종 21년 (1695.02.05)
좌의정 박세채가 파주에서 졸하다.

숙종 21년 (1695.07.28~08.02)
파주에 밤마다 서리가 내렸다.

숙종 27년 (1701.07.14)
파주지역에 병충해로 곡식이 피해를 입다.

숙종 39년 (1713.05.28)
자운서원에 합향했던 김장생과 박세채의 배향에 대해 논의 하다.

숙종 39년 (1713.09.02일)
북한산성의 환곡을 파주, 교하 등에 나누어 주다.

27세 인증(仁曾 字 元卿) (1693년~1742년)
27世 휘증(徽曾, 字 美卿) (1701년~1740년)

영조 04년 (1728.11.02)
파주의 환곡을 탕감하다.

영조 05년 (1729.01.26)
파주에 효장세자를 장사지내다.

영조 07년 (1731.03.16)
장릉에 뱀이 나타나다.

영조 07년 (1731.08.04)
새 능을 정한 교하현을 군으로 승격하다.

영조 07년 (1731.08.17)
어가가 장릉에 이르다.

28世 : 희담(喜聃 字 公著) (1712년~1771년)

28世 : 희일(喜一, 字 汝咸) (1724년~1803년)

28世 : 희양(喜陽, 字 道而) (1727년~1777년)

28世 : 희함(喜咸 字 君一) (1732년~1814년)

28世 : 희상(喜商, 字 伯殷) (1735년~1815년)

영조 10년 (1734.11.13)
파주지역에 화적과 호환이 극성을 부리다.

영조 16년 (1740.08.29)
후릉에 나가기 위해 임금이 파주에 이르다.

영조 10년 (1734.11.13)
파주지역에 화적과 호환이 극성을 부리다.

영조 16년 (1740.08.29)
후릉에 나가기위해 임금이 파주에 이르다.

영조 25년 (1749.02.11)
임금이 화평옹주 묘를 둘러보고 소령묘에 이르다.

영조 28년 (1752.01.21)
효순왕후가 37세로 세상을 떠나다.

29世 : 홍규(鴻逵 字 汝漸) (1745년~1765년)
29世 : 붕규(鵬逵 進士公, 字 雲擧) (1749년~1783년)
29世 : 형규(亨逵 字 穉會 初名 相喆) (1751년~1814년)
29世 : 익규(翼逵 字 聖甫) (1759년~1815년)
30世 : 선(銑 字 玉汝) (1766년~1838년)
29世 : 운규(雲逵 字 子禎 司馬公) (1769년~1840년)

영조 40년 (1764.11.09)
구 장릉의 토지를 개간하게 하다.

영조 41년 (1765.02.23)
파주의 심씨와 윤씨네가 산송을 벌이다.

영조 46년 (1770.09.02)
임금이 소령원에 제사지내고 능원관을 승진시키다.

영조 51년 (1775.02.11)
파주목사 홍화보가 승지로 부임하다.

정조 02년 (1778.08.20)
임금이 소령원에 배알하다.

정조 04년 (1780.09.03)
임금이 영릉에 친히 제사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파주에 머물다.

정조 07년 (1783.07.01)
파주가 가뭄으로 농사가 어려워지다.

30世 : 용(鏞 字 聖載) (1770년~1856년)
30世 : 황(鎤 字 聲若) (1777년~1848년)
30世 : 성(鍟 字 星仲) (1780년~1841년)
31世 : 시행(始行 字 伯源) (1788년~1824년)
31世 : 두영(斗榮 字 致建) (1795년~1855년)

정조 09년 (1785.02.25)
파주의 증 직제학 성수종을 파산서원에 배향하다.

정조 10년 (1786.11.11)
효자와 열녀에 정문을 하사하고 호역(戶役)을 면제하다.

정조 14년 (1790.02.13)
파주유생이 백인걸,이이,성혼등의 사당문제를 상소하다.

정조 16년 (1792.02.24)
영릉으로 가는 도중 파주목사 이민복에게 백성의 병폐를 듣다.

정조 18년 (1794.03.28)
기강을 확립하지 못한 파주목사를 처벌하다.

정조 18년 (1794.11.16)
암행어사 홍낙유가 파주목사의 파출을 요청하다.

정조 23년 (1799.09.17)
경기관찰사 서정수가 황희 묘역이 허술하다고 장계를 올리다.

30世 : 수익(秀翼 字 景順)(1802년~1888년)
31世 : 시영(始榮 字 雅善) (1803년~1868년)
31世 : 시헌(始憲 字 文甫) (1813년~1880년)
32世 : 교일(敎一字 德卿) (1823년~1878년)
31世 : 좌영(佐榮 字 聖佑) (1825년~1890년)
32世 : 교응(敎膺 字 元七) (1832년~1901년)
32世 : 교성(敎誠 字 元三) (1832년~1899년)

순조 06년 (1806.07.13)
임진왜란시 전사한 전파주목사를 표절사에 제향하다.

순조 08년 (1808.08.09)
임금이 영릉, 순릉, 공릉에 제사지내다.

순조 12년 (1812.03.13)
파주 김한규의 처 한양조씨에 열녀정려질을 내리다.

헌종 08년 (1842.03.10)
임금이 파주목 행궁에 유숙하다.

헌종 13년 (1847.02.22)
임금이 장릉에 들러 전배하고 파주목 행궁에 유숙하다.

33世 : 종호(宗鎬 字 聖殿) (? ~1912년)
32世 : 교승(敎承 字 伯先) (1852년~1919년)
33世 : 정호(鼎鎬 字 景九) (1854년~1882년)
32世 : 교덕(敎德 字 重其) (1865년~1928년)
32世 : 교설(敎卨 字 舜明) (1879년~1909년)
34世 : 제익(濟益 字 汝兼) (1881년~1955년)
33世 : 용호(龍鎬 字 義圖) (1882년~1934년)
31世 : 시배(始培, 字 養之) (1884년~?)
32世 : 명세(命世 子 敬天) (1887년~1906년)
33世 : 종호(宗鎬 字 聖殿) (1889년~1972년)
33世 : 성호(星鎬 字 福景) (1892년~1933년)

철종 14년 (1861.07.07)
태풍에 무너진 파주의 가호에 휼전을 베풀었다.

고종 03년 (1866.10.15)
이양선 출몰에 대비해 파주에도 진을 치다.

고종 04년 (1867.01.25)
파주목의 전세를 대납하도록 하다.

고종 13년 (1876.03.11)
동학농민운동 가담자 박재식이 파주에서 효수되다.

고종 22년 (1885.09.10)
파주의 전결 납부기한을 연기하다.

고종 28년 (1891.12.31)
혜음령에 도적의 출몰이 잦다.

고종 31년 (1894.07.05)
교하에 주둔한 일본군이 촌락을 습격, 약탈하다.

고종 32년 (1895.01.14)
파주목을 파주군으로 개편하다.(군청사:파주리)

광무원년 (1897.10.12)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다.

33世 : 동선(東善 號 月峰) (1904년~1975년)
35世 : 희채(喜采 號 藥云) (1909년~1972년)
33世 : 태호(泰鎬 字 魯瞻) (1911년~1950년)
33世 : 승호(昇鎬 字 守天) (1913년~1978년)
35世 : 우채(祐采 字 友容) (1914년~1979년)
33世 : 영호(永鎬 字 仲明) (1919년~1977년)

1904년 군 청사 이전 (문산리 73-1번지)

1906.04.03
경의선 열차운행 개시(용산~신의주 구간)
(1900년 대한제국이 철도건설 개시, 이후일본이 군용철도로 건설)

1907.09
파주 등에서 의병이 봉기하다.

1907.09.09
의병 300명이 적성을 습격해 일본인을 살해하다.

1910.08.19
일본 침략으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다.

1913.05.10
파주공립보통학교 설립인가

1913.07.28
교하공립보통학교 설립인가

1914.03.01
행정구역개편으로 교하군이 파주군에 편입하다.

1919.03.28
조리면민 2000명이 면사무소를 습격하다.(3명사망, 3명부상)

1933.03.25
파주 삼성초등학교 개교

1945.08.15
일본 패망 선언 (광복일)

1948.05.10
최초 총선 실시 (제헌국회 구성)

1948.10.30
서울(김포공항)~부산간 민간항공기 취항

1950.06.25
북한에 의한 6.25 전쟁이 발발하다.

1951.01.04
파주군청사 이전 (금촌읍 아동리 215번지)

1954.10.28
용미리 미륵불 보수 제막식에 이승만대통령이 참석하다.

1968.02.03
경부고속도로 기공(서울~수원 구간)

1972. 장단군 군내면, 진서면, 진동면이 파주군에 편입되다.

1973.08.31
통일촌 주민 입주식 개최

파평윤씨 16개파(派)

1

①함안파

11세 希甫 (희보)

2

②남원파

11세 英贊 (영찬)

3

③덕산군파

09세 殷衡 (은형)

4

④문정공파

07세 尹麟瞻 (윤인첨)

5

⑤신령군파

08세 尹仁直 (윤인직)

6

⑥대언공파

12세 尹安적 (윤안적)

7

⑦봉록공파

12세 尹中珇 (윤중조)

8

⑧판서공파

14세 尹莅 (윤심)

9

⑨야성군파

14세 尹赫 (윤혁)

10

⑩전의공파

14세 尹承休 (윤승휴)

11

⑪소정공파

15세 尹坤 (윤곤)

12

⑫원평군파(原平君派)

15세 尹穆 (윤목), 윤승례의 2남

13

⑬소도공파(昭度公派)

15세 尹向 (윤향), 윤승례의 3남

14

⑭판도공파(版圖公派)

14세 尹承禮 (윤승례), 판도공파 — 尹承禮 (윤승례), 윤척의 형제 계열, 원평군파·소도공파의 부친
판도공파의 의미 : 문지리 종친회 계보에서 여러 후손들이 판도공파로 입계(入系)하거나 출계(出系)하는 기록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판도공파는 계보 전체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합니다.

15

⑮소부공파(少府公派)

12세 尹諳 (윤암),문현공 윤보의 아들 계열

16

⑯태위공파(太尉公派)

12세 尹安庇 (윤안비), 문현공 윤보의 아들 계열

세계(世系) 전체 흐름 요약

파평윤씨 문천군수공파는 시조 윤신달로부터 34세 이상에 이르는 유구한 계보를 자랑합니다.

파평윤씨의 역사적 의의

파평윤씨는 고려·조선 시대를 통틀어 수많은 명신과 공신을 배출한 명문 가문입니다. 특히 5세 윤관(尹瓘)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축조는 한국사에 길이 남는 업적입니다.

문천군수공파(文川郡守公派)는 소정공(昭靖公) 윤곤(尹坤)을 파조(派祖)로 하여 9개 방파로 분파되었으며, 문지리 지역으로 한 종친회를 중심으로 오늘날까지 그 전통과 유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파평윤씨 계보 (전체)

38+

세대(世代)

시조 윤신달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세대 수

16

분파(分派)

①함안파부터 ⑯태위공파까지 총 16개 파

9

방파(房派)

소정공 윤곤의 후손 9개 방파


파평윤씨 문천군수공파 문지리 종친회 계보도 - 가문의 뿌리를 기억하고 후손에게 전합니다.

종친회 활동사진


[2025년 시제사진]

파평윤씨 문천군수공파 문지리 종친회
坡平尹氏 文川郡守公派 文智里 宗親會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방촌로 1009-19
Tel : 010-7122-8114 (종친회장 : 윤영중)
Email : delight811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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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참조 : 대종회카페, 35世孫 윤명채
Website designed by 윤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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